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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Nov 21. 2022

또 한 명의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을 보며 2022년 현대판 「서울 학당」을 꿈꾸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67636&cid=58859&categoryId=58859

(저작권 관련 문제로 링크로 대신한다.)


  이 프레스코(「아테네 학당」)의 56번째 인물화는 지금까지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를 표상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테네 학당」에서 라파엘로가 지식 전달 집단으로 표현한 사제 집단에서 바깥으로 밀려난 소수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헤라클레이토스 주변에는 진지한 철학 문하생이 한 명도 없다. 검은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자신의 문제로 넋이 나간 헤라클레이토스는 움켜쥔 손으로 머리를 괸 채 무언가를 미친 듯이 종이에 휘갈겨 쓰느라 주변에서 벌어지는 철학 논쟁도 완전히 망각한 듯하다. 가죽 장화와 허리에 꼭 끼는 셔츠를 입은 헤라클레이토스는 맨발에 흐르는 느낌의 겉옷을 걸친 다른 동료들에 비해 꽤 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있다. 이 인물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넓고 펑퍼진 코로 많은 미술가들은 바로 이 코의 특징 때문에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델을 미켈란젤로라고 확신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본 라파엘로는 존경의 의미로 미켈란젤로의 인물화를 프레스코에 추가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델이 미켈란젤로가 틀림없다면 라파엘로의 경의는 상반된 측면이 있다. ‘애매모호한 헤라클레이토스’, 또는 ‘구슬피 우는 철학자’로 불리는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가 끝없이 유전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 가설은 그가 말한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뛰어들 수 없다.”, “해는 매일 새로 뜬다”는 매우 유명한 두 가지 격언에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라파엘로가 이 철학자에게 미켈란젤로의 외모적 특징을 부여한 것은 만물유전의 세계관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전설이 되다시피 한 미켈란젤로의 심술궂은 성미와 경쟁자들에게 보이는 심한 경멸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피타고라스나 크세노파네스, 헤카타이오스와 같은 선배들에게 경멸에 찬 말들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심지어 호머에 대해서도 그따위 눈먼 시인은 말채찍으로 실컷 두들려 패주어야 한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에페수스의 시민들 또한 까다로운 이 철학자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들을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죄다 목매달아야 한다고 썼다.
  그러므로 「아테네 학당」에 등장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존경하는 미술가에게 손을 들어 경례하는 의미도 있지만 무뚝뚝하고 냉랭한 성미의 미켈란젤로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의미도 있었던 셈이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를 「아테네 학당」에 편입시킴으로써 스탄차 델라 세냐투라의 벽에 그려진 라파엘로 자신의 작품들이 시스티나 예배당 천당에 나타난 미켈란젤로 양식의 웅장함과 엄숙함, 강건한 체력과 운동선수 같은 자세,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색조 때문에 무색해졌음을 암시했다. 달리 말해 미켈란젤로가 개별적으로 분리해 그린 구약성서상의 인물들이 라파엘로가 표현한 「파르나소스」와 「신아테네」의 고상하고도 감동어린 고전적 세계를 가려버린 것이다.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 p.333~336  


    사실 처음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만큼 인상 깊게 다가온 작품이 바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었다. 평소 철학과 윤리를 좋아해서인지 다양한 철학자들의 특징을 그림으로 표현해 그들을 한곳에 모아둔 그 그림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림에 대한 모든 설명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헤라클레이토스의 모델이 미켈란젤로라는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책 속에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그리고 또 다른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까지 천재가 또 다른 천재를 보며 서로에게 느꼈던 존경심과 질투심 그 묘한 감정들이 빚어내는 내면의 갈등과 그것을 바탕으로 발전한 르네상스 예술이 너무나 생생하게 드러나 있어 드라마를 보듯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질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의 성취를 보며 진심으로 축하하기 이전에 그보다 못난 듯한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러움과 내면의 상처를 마주하는 게 바로 인간이다. ‘비교’가 불행의 시작이자 지름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타인으로 향하는 시선을 쉽게 이겨내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질투를 동력으로 결국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 세 명의 대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싶다. 지금은 세 명의 대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고, 삼인삼색 다른 빛깔을 지니고 있기에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는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거 아닌가? 그러니 오늘도 찌질하게 비교와 질투의 늪에서 허우적댔다고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투는 본능이기에 그 질투를 어떻게 내 삶의 동력으로 삼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니.




  한편 미술의 측면과는 별개로 교사의 입장에서는 이 아테네 학당 전체의 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각자의 개성을 잘 드러내며 자유롭게 사유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공부하는 학당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학교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림 속 허구의 세계가 왠지 모르게 계속 부러워 오랜 시간 넋을 놓고 보고 또 보았다. 물론 그림 속 모든 인물이 행복해보이지는 않고 막상 그림 속 세상으로 들어간다면 그곳에도 분명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마치 문제를 잘 푸는 AI를 길러내고 있는 듯한 오늘의 고3 교실보다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진짜 세상은 생명력을 잃어가고, 가짜 세상에서 오히려 생명력을 느끼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화를 꾀할 수 있을까? 「아테네 학당」은 이렇게 또 하나의 교육적 화두를 던졌다. 


  더불어 나는 윤리 교사는 아니지만 「아테네 학당」은 이 그림 한 장만으로도 한 학기의 좋은 철학 수업 교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또 국어 수업이라면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문학사 수업도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특징을 잘 포착해 <한국 문학 학당>과 같은 그림으로 한데 모아 수업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고 아직 날것의 것들이라 실제 수업으로 옮겨오려면 많은 가공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교사들의 이러한 작은 날갯짓들이 교육의 방향을 바꾸는 긍정적인 나비효과로 나타날 것이라 믿는다. 나는 오늘도 내가 있는 이곳에서 2022 현대판 「서울 학당」을 꿈꾼다.


* 미켈란젤로, 고흐와의 만남은 계속 집필중입니다. 완성되는 대로 하나씩 브런치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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