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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Nov 21. 2022

미켈란젤로의 풍자적 유머?!

천장화에 손가락 욕이 숨어 있을 줄이야...

  어떤 경우든지 간에 이 흉물스러운 쪼그랑할멈과 그녀의 예언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태도는 그녀 곁에 있는 두 벌거벗은 아이들 중 하나의 손짓에 함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아이는 쿠마에아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단테의 작품에도 묘사되어 있는 이 손가락질은 엄지손가락을 검지와 가운데손가락 사이에 끼어 넣고 내미는 경멸의 동작으로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욕으로 통한다.  
  이 손가락질은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에 그려 넣은 수많은 음흉한 농담들 가운데 하나였으나 사진기나 망원경 같은 시각 보조기구가 없던 시대여서 마루에 앉은 사람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었다. 무뚝뚝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 미술가는 풍자적인 유머로 유명했다. 일례로 미켈란젤로는 이런 농담을 했다. 어떤 미술가는 황소 그림 하나만큼은 아주 잘 그렸지. 화가라면 누구나 자화상쯤은 다 잘 그리는 것 아닌가.
  쿠마에아 무녀의 등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이 벌거벗은 소년은 미켈란젤로가 어떤 경우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십자가와 가시에 관한 그의 시처럼, 여기에는 교황이나 황금시대에 관한 에지디오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한 조소도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 p.243


   아니 천장화에 손가락 욕이 숨어 있다고? 신성한 성당의 천장에 그려진 그림 속에 이 음흉한 농담이 숨어 있다는 게 너무 궁금해 읽던 책을 놓고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책의 설명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다 보니 ‘이브의 창조’ 옆에 근육질 할머니로 묘사된 무녀가 있었고, 정말 자세히 보니 소년의 손가락질은 경멸의 동작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재미있었던 것은 그림을 자세히 보다 보니 다른 부분에서도 이와 유사한 손가락질을 또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찾아봤더니 선지자 ‘스가랴’였는데, 이 스가랴의 얼굴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얼굴을 그려 넣고 뒤에 있는 천사들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손가락욕을 하는 장면을 슬쩍 집어넣음으로써 교황에 대한 풍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림에 숨어 있는 함의와 배경을 찾아내며 그림을 감상하다 보니 마치 퀴즈를 푸는 것처럼 그림 감상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동안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그림 구석구석에 또 무엇이 숨어 있을까? 궁금증은 나를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시대로 데려갔다. 비록 역사를 조망하는 식견이 부족해 때때로 엉뚱하거나 다소 무리한 해석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그 어떤 세계사 공부보다 시대를 읽어내기에 적절한 것이 바로 그림 읽기였다. 결국 그림은 시대를 읽어내는 또 다른 도상이었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온 것은 미켈란젤로가 '십자가와 가시'에 관한 시를 썼다는 부분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시도 썼다고? 나는 그동안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에 능한 예술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무지하게도 시를 썼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가 남긴 소네트(Sonnet)가 무려 300편이 넘는다고 했다. 괴테도 인문학부터 자연과학, 색채론까지 정말 다방면에 능한 대가였는데, 역시 모든 천재들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멀티플레이어인가? 이 세상은 복잡계이고 결국 모든 학문과 예술은 다 연결되고 통한다는 진리에 새삼 다시금 공감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긴 그림 속에 숨겨둔 여러 풍자 코드를 보니 그가 문학에 능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연결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기나긴 인생의 여정은 폭풍 치는 바다를 지나,
금방 부서질 것 같은 배에 의지해,
지난날의 모든 행적을 기록한 장부를 건네야 하는,
모든 사람이 거쳐 가는 항구에 도달했다네.
예술을 우상으로 섬기고 나의 왕으로 모신,
저 모호하고 거대하며, 열렬했던 환상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네.
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욕망도 헛것이었네.
옛날에는 그토록 달콤했던 사랑의 꿈들,
지금은 어떻게 변했나, 두 개의 죽음이 내게 다가오네.
하나의 죽음은 확실하고, 또 다른 죽음이 나를 놀라게 하네.
어떤 그림이나 조각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네.
이제 나의 영혼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껴안기 위해
팔을 벌린 성스러운 사랑을 향해 간다네.


  이 시는 조르조 바사리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에 나오는,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썼다는 소네트를 미국의 시인 롱펠로가 영역하고 이를 최영미 시인이 다시 한역한 것이다. 당대 아니 세계사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 위대했던 예술가가 평생을 바쳤던 자신의 예술 세계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며 죽음 앞에서 신앙에 의지하는 모습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문득 몇 년 전 전시회에서 봤던 폴 고갱의 그림이 생각났다. 그림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인간들도, 괴테나 미켈란젤로, 고흐 같이 위대한 대가들도 비록 각자 삶의 방식과 초점은 다르지만 결국은 그림이 던지는 생의 본질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걸었고 또 지금도 걷고 있는 것 같다. 천재는 나와 결이 다른 사람들, 무언가 그들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들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들을 아예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라 규정하고 대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들은 인류에 오래도록 기억될 위대한 업적을 남기면서도 인간적으로는 고독하고 쓸쓸하고 끊임없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문득 아쉽게도 직접 보지는 못하고 사진으로만 감상했던 밀라노의 ‘론다니니 피에타’가 떠올랐다. 죽기 이틀 전까지 조각했던 앙상한 피에타가 그가 20대 때 자신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며 조각했던 화려한 피에타보다 더 삶과 예술의 요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방구석 기행을 통해 그와 확실히 더 가까워진 듯하다. 지금 그가 내 옆에 있다면 따뜻한 손편지를 건네고 싶다. 이번 기회에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를 제대로 한번 배워봐야겠다. 번역으로 한국어의 맛을 살리기 힘든 것처럼 이 시들도 원어로 읽으면 분명 더 큰 울림이 있을 거기에. 나라마다 수집하듯 모았던 ‘어린 왕자’의 다양한 외국어 버전 책을 드디어 펼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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