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걸음씩 Aug 27. 2024

수술실 앞에서

길고 긴 하루였다.

많이 지치기도 하고...

병실배정이 어려울 수 있으니 아침 일찍 오라고 해서 새벽에 출발했더니 1등으로 도착했다.

병실을 배정받는 게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선착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병원에 하루 있어보니 그럴만해 보였다.

수술실 맞은편에 있는 중환자실 앞에서 간병인과 중환자실 담당자의 대화를 듣고 이해가 됐다.


"저 간병인인데요. 000 환자 두시에 병실로 옮긴다고 해서 왔어요."

"000 환자 오늘 못 올라갑니다. 병실이 없어요."


아마도 전공의 파업 때문에 환자들이 몰려든 여파도 있을 것이다.

아들도 신장이식 수술을 했던 S대학병원에서 암수술을 하려고 했으나 수술은커녕 의사 진료예약조차 잡기 어려운 상황이라 교회 형제의 소개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다.

입원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올라갔는데 아직 퇴원환자 침대가 정리가 안 됐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 시간이 아홉 시도 채 안된 시간이었다.


"너도 퇴원하는 날 아침 일찍 서둘러 나와야 하는 거 아니니?"


아들은 요양처럼 며칠 입원하겠다고 했으나 꿈같은 이야기다.

병원에서 그렇게 해줄 리도 없고.


병원에는 간호 실습을 나온 남학생들도 여럿 보였다.

간호사와 상담 중인 아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내 옆에 와서 인사를 하며 서있는 남학생이 어찌나 귀엽던지...

종종 실수를 하며 민망해하면서 


"죄송해요. 제가 학생이라 잘 몰라서요."


라고 사과를 할 때는 엄마 미소로 따뜻하게 괜찮다고 해줬다.


수술당일 입원이라서인지 간호사실에서 꽤 긴 상담을 하고 병실로 옮겼다.

긴장해서 잠을 못 잤는지 아들은 수술 전에 꿀잠을 잤다.

수술 시간이 되어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가는데 민망하다며 얼굴을 가리는 아들.



길고 길게만 느껴졌던 수술시간.

입원실인 8층까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다가,

편의점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사 오기도 하고,

심한 두통을 달래려 밖에 나가 더운(?) 공기도 마셔보고,

1층 로비에 앉아 멍도 때려보고,

병실 침대에 누워있기도 하고...

그래도 시간이 안 간다.


두 시간가량 걸린다는 예상과 달리 아들은 두 시간 반이 훨씬 지나서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

"아씨, ㅈㄴ 아파"


혈색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하는 첫마디가 욕이라니... 이 녀석이...

근데 욕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 건 또 무슨 심리야,,,

함께 병실로 돌아와서 계속 메스꺼움과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안다.

나도 수술했을 때 통증보다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웠으니까.

잠시 후 수술을 집도한 주치의가 회진을 왔다.


"신장 때문에 항생제도 안 쓰고 약물을 최소화할 거예요.

깨끗한 수술이니까 항생제 안 써도 되고.

어쨌든 약물은 가능하면 투여 안 할 테니까 조금씩 운동도 하고, 물도 마시고.

알았죠?"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나간 후로 똑똑하게 생긴 남자 간호사가 와서 식사에 대해 묻는다.

금지해야 할 식품이 무엇이 있는지 알려달라며 쌍꺼풀이 진 귀여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메모판을 들고 섰다.


"익히지 않은 육류나 생선, 자몽, 오미자. 그 정도만 하시면 돼요."


아들 어릴 때는 내가 다 설명을 했는데 성인이 되니 젊은이들끼리 통하는 말로 간단하게 설명을 잘한다.

나이를 먹으면 쓸데없는 질문과 수식어들이 따라붙기 마련이라 나는 입을 닫고 망부석처럼 서있는다.


그때부터 아들은 많이 힘들어했다.

진료 때 의사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던 말만 믿고 수술 후에도 말짱할 줄 알았나 보다.

마취가 덜 깨어 계속 졸리다며 잠을 자고 싶어 했고 나는 눈을 감는 아들을 계속 깨웠다.

잠이 들어야 통증도 구토도 잊을 것 같다며 자고 싶어 했다.

그러나 폐에 있는 가스를 뱉어내야 한다며 잠들지 말고 계속 호흡을 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을 아들에게 상기시키며 깨웠다.

그러다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럼 5분만 자라며 재워주기도 했다.

서른이 넘어도 여전히 엄마한테는 안쓰럽다.

결혼했으면 애아빠가 됐을 나이인데...


수술하고 나면 능이백숙을 먹겠다느니 메로나를 먹겠다느니 하던 호기는 온데간데없고 저녁으로 나온 흰 죽도 간신히 절반만 먹었다.

구토와 통증을 재워주는 약처방을 받고 나서 조금씩 아들 본연의 모습을 찾는 걸 보면서 집으로 와야 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코로나 이후로 통합 간병제를 시행해서 실제로 간병하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암수술을 한 환자를 혼자 두고 간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열두 시간씩이나? 했는데 정말 열두 시간이 모자란다.

힘들면 꼭 연락하라며 바로 오겠다고 하니 이제 빨리 좀 가라고 해서 병원을 나섰다.

속도도 안나는 똥차를 있는 대로 밟고 집으로 왔다.

피로가 몰려와서 아무것도 못하겠다.

허기가 져서 간신히 밥 한 그릇 김치에 먹고 세수만 한 채로 잠이 들었다.

이런저런 꿈을 꾸며 잔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난다.


새벽에 톡을 하니 어제보다 나아졌다며 농담까지 하는 아들의 답톡에 마음이 놓인다.


작가의 이전글 수술 D-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