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각성하는 육각부적 메뉴얼 ver.1

500살 먹은 흡혈귀 할머니 릴리시카의 고마법서 해설

by stephanette

나는 500살 먹은 흡혈귀 할머니 릴리시카이다.

흡혈귀 왕국의 성 내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

오래된 과거의 내면아이가 숨어있는 방을

정리하며 결로 방지 페인트를 칠해왔다.


아직 치우지 못한 방에서

먼지가 소복히 쌓인 오래된 마법서를 찾았다.

샌달우드 오일을 뿌린 듯 명도 높은, 현무암 재질의 양장본 벽돌책이다.


이상하게도 책장은 가장자리만 누렇게 변한채 생각보다 그리 바래지 않았다.

그리 펼쳐보지도 않는 책인 것 같다.

그래서 까맣게 잊고 있었나보다.


목차를 훑어보다가 마음에 드는 부적이 있다.

자신의 본성을 찾아내어 '각성'하게 만드는 부적이다. 멋지지 않은가.

이 책을 읽어보던 어린 날에는 이 부적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었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깨끗하게 읽은 흔적도 없을 수가.

하긴, 사람들은 눈 앞에 두고서도 그것이 보물인지 모른다.

육각부적 메뉴얼을 업로드한다.


자신을 각성하는 육각부적 메뉴얼

1. 준비물

- 육각형으로 잘라낸 종이: 금색, 노랑, 흰색 권장 / 크기는 자유

- 검은 펜이나 붓과 먹물

- 초 1개


2. 구조와 배치

- 육각형은 조화, 균형, 완결성을 상징한다.

- 여섯 면은 각각 인간의 감정, 몸, 정신, 관계, 시간, 운명을 담는 그릇이다.

- 종이를 정육각형으로 잘라내고, 6개의 삼각형이 되도록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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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적에 글자 쓰는 법

6개의 글을 각각의 삼각형 속에 쓴다.

하나의 삼각형: 육각형 중심에 있는 꼭짓점이 위로 가게 놓고,

밑변이 아래로 오게 놓고 위에서 아래로 글자를 쓴다.

다 쓰고 나면 다른 삼각형을 같은 방식으로 돌려서 놓고 부적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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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법

부적을 한 방향(보통 시계방향) 으로 한 면씩 60°씩 돌려가며 읽는다.
총 여섯 번 돌리면 6면을 모두 읽게 된다.

단, '분신술'이 가능하다면, 자신을 6명으로 만들어서 다 함께 동시에 읽어도 무방하다.


3. 방법

가. 정화: 종이를 손에 쥐고 세 번 깊게 호흡한다. 4(들숨)-4(정지)-7(날숨)으로 3번

나. 중심: 가운데 꼭짓점에 각각 해당 글자를 쓴다. (천, 지, 인, 인, 시, 미)

다. 확산: 각 삼각형 내에 문장을 작성한다.

천天(가운데 꼭짓점에 쓴다.): 나를 살아있게 한 큰 힘(자연, 우주, 신성)에 대한 감사

지地(천의 시계방향 옆 삼각형에 쓴다.): 현생에서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

인人: 가족, 친구, 지인, 직장 동료 등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감사

인人: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 인연들과 귀인들에 대한 감사

시時: 주어진 시간, 흐르는 순간, 나의 삶의 여정에 대한 감사

미未: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가능성과 열리지 않은 길들에 대한 감사

라. 봉인: 밑변에 선을 따라 파동선을 그린다. 6개가 완성되면 닫힌다.

마. 활성화: 초를 켜고, 불빛에 부적을 비추며 3번 읽는다.

바. 반복: 배겟잎에 두고 잔다. 다음날 가. 정화마. 활성화를 반복한다.

사. 완결: 21일째 되는 날, 부적을 불에 태운다.


4. 주의사항

가.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작성하지 않는다

: 마음의 파동은 글자에 담겨서 부적에 깃든다.

나. 소멸의식: 완결 이후에는 불로 태우거나 물에 흘려보내야 한다.

현대인들은 화장실 변기 말고는 흘러가는 물이 없으니 참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 부적은 표절하지 말 것! 서툴러도 자신의 염원을 담아서 작성해야 한다.

: 한 번 잃어본 사람들은 지금 가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절하게 염원을 담을 수 있다.

그러니, 삶이 한 번 망가졌던 사람은, 부적을 쓰는 능력면에서 레벨업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유지원 타이포그래퍼의 시 모음 전시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안 비밀.

그녀의 작업은, 글자를 단순한 활자가 아니라 숨 쉬는 존재로 만든다.
릴리시카에게 부적의 글자가 파동과 에너지로 살아 움직이듯,
그녀의 타이포그래피도 종이 위에서 스스로 빛을 발한다.


나는 그녀의 디자인 작품들을 오래도록 애정해왔다.
책장을 장식하는 세익스피어 전집조차,
문학을 담은 매개체를 넘어 예술적 오브제가 된다.
활자 하나, 표지 하나가 이미 주문(呪文)의 형태다.


그래서일까.
내 부적의 글자들도 결국은 디자인이다.
마음을 담아 쓴 획, 감정이 새겨진 곡선, 파동선을 따라 흐르는 진동.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타이포그래피와 마법이 만나는 자리에서 살아난다.

스크린샷 2025-08-24 052834.png 민음사, 세익스피어 전집, 최종철 연세대 교수의 운문 번역판, 유지원 홍대 교수 및 타이포그래퍼의 표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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