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무너지는 위험한 신호들

그림자, 동일시, 동조 — 세 가지 심리적 함정에 대하여

by stephanette

*사진: Unsplash


숲속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이 있다. 소리는 짧지만 그 여운은 길다. 그 소리는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면서 동시에 내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칼 융이 말한 위험한 심리적 징후들도 이와 같다. 그들은 대개 아주 미세한 신호로 다가와, 끝내 관계와 세계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균열로 자라난다.


첫 번째는 그림자 투사다.

내가 견디지 못하는 나의 일부를 타인에게 건네는 행위. 누군가를 이유 없이 증오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숭배할 때 우리는 사실 그에게서 나의 그림자를 보고 있다. 거울을 부수고 싶은 순간, 사실은 거울이 아니라 그 안의 나를 부수고 싶은 것이다. 관계는 이 투사에서 무너진다.

예를 들면, 연인 관계에서 ‘너는 이기적이야’라는 비난 속에서 파괴되고, 동료는 ‘너는 게으르다’는 분노 속에서 악마화된다. 영웅 투사 즉, 유명인을 과도하게 이상화하는 것은 내 힘을 타자에게 넘겨 자기 효능감이 급락한다. 대규모 학살 같은 역사적 비극은 대개 집단적 그림자 투사가 폭주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그 말들은 언제나 내 안에서 기원한다. 이 위험은 결국,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가장 치명적이다.

투사를 경고하는 신호들을 알아보자. 분노, 혐오, 숭배가 지나칠 때 그 감정의 과잉을 통해 알 수 있다. 선과 악으로 나누는 흑백사고에 빠지는 경우이다. 장소와 사람이 바뀌어도 같은 갈등이 반복될 때 알 수 있다. 이런 전조들을 통해 자신이 투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수 있다. 보다 구체적인 방법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능동적 상상은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대상을 떠올리고 나와의 대화를 통해 그 특성이 내 안에도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언제 이기적이 되는가? 그때 내 두려움은 무엇이었나? 등의 질문을 해본다. 감정과 사실을 구분하여 메모를 한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찬찬히 생각해서 적어본다. 그리고, 실제 일어난 사실을 구분해본다.


두 번째는 무의식과의 동일시다.

중독이 가장 분명한 사례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고, SNS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SNS가 나를 사용한다. 그 순간 자아는 자취를 감춘다. 더는 선택할 수 없고, 단지 충동에 의해 사용될 뿐이다. 완벽주의자, 피해자, 성공 지향자, 로맨스 지향자 이 모두 동일한 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동일시의 문제는 이것이다.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자유의지를 잃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행동의 주체가 무의식이 될 때, '분노가 나를 사용'하는 등의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 인식을 차단하고 선택의 자유를 상실한다.

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명상, 마음챙김, 일기 등을 통해 감정과 행동 그리고 트리거- 촉발 요인을 기록하고 인식할 수 있다. 반대 행동을 실험한다. 완벽주의자라면 의도적으로 80% 완성으로 제출해본다. 내적 대화 스크립트를 자기 내면에서 대화를 통해 만들어본다. 완벽한 나와 불완전해도 괜찮은 나와의 대화, 성공에 맹목적인 나와 실패해도 괜찮은 나와의 대화 등이 해당된다.


세 번째는 집단적 무의식의 동조다.

집단이 내 생각을 대신하는 상태. 알고리즘이 만든 메아리의 방 안에서 나는 확신을 얻지만 동시에 나를 잃는다. 편향성은 편향을 더 편향되게 만든다.

AI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챗지피티는 동조하는 답변을 내놓는다. 그 친절은 일종의 아첨일 수 있다. 집단의 의견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장된 정보들을 가공하여 결과물을 내놓는 AI의 목소리는 집단의 의견을 하나의 진리처럼 들리게 한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다. 평범한 개인이 집단의 이름으로, 스스로는 결코 하지 못할 잔혹을 실행한다. 정치적 극화, 종교적 광신, 기업 문화, 가족의 규율—그 어디에서도 이 메커니즘은 작동한다.

집단적 동조가 위험한 이유는 명확하다. 집단이 내 생각을 '대행'하는 상태로 도덕적 판단이 마비된다는 것. 나의 양심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며, 그저 집단의 소음 속에 흡수된다.

이에 저항하는 기술이다. 내가 속한 집단을 목록화한다. 가족, 직장, 정치, 종교, 계층 이 집단에서 나의 생각에 미치는 요구를 적어본다. 역 관점 훈련 - 확신과 정 반대 관점의 논거를 공정하게 요약해본다. 산책, 독서, 명상, 글쓰기 등 고독의 시간을 확보하여 내 목소리를 복원한다. 소수 의견 존중의 습관, 진리는 종종 소수에서 시작된다. 질문의 근육을 키운다. 왜? 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등의 질문으로 불편함을 견디는 용기를 기른다.


이 세 가지 징후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인간은 언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잃는가. 투사에서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잃고, 동일시에서 인간은 충동을 통해 자신을 잃고, 동조에서 인간은 집단을 통해 자신을 잃는다. 결국 문제는 ‘나를 잃음’이다. 자신을 잃은 인간은 인간 관계가 부서지고 삶도 함께 망가진다. 그러므로 치료의 출발점은 언제나 ‘나로 돌아오는 것’이다.

융은 그것을 개별화라 불렀다. 그림자를 인정하고,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올리고, 집단의 압력 속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일. 그것은 화려한 승리가 아니라 고독한 연습의 반복이다. 그러나 그 고독을 통과해야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유연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 문장을 다시 적어본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운명이 된다. 그러나 의식하는 것은 변화가 된다.”

나는 그 문장에서 문학과 심리학이 교차하는 순간을 본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잃는 방식으로도 살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되찾는 방식으로도 살 수 있다.

어쩌면 모든 문학은 이 되찾기의 기록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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