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서 시작된 삼천포 - 결핍에서 시작된 책에의 열망
책상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버렸다.
늘 그렇듯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잦다.
그렇지만 이번만은, 먼저 전집에 대한 기억을 풀어보고 싶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파란색 양장본으로 된 과학 전집이다.
라이프지에서 나왔던 그 책들은 단단한 종이와 눈이 번쩍 뜨이는 컬러 인쇄로 가득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나는 언제나 그 이미지들 앞에서 넋이 나갔다.
프랙탈, 화학의 분자 구조, 중세의 의학 도해 같은 것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역시 나는 문과보다 이과 체질에 가까운가 보다.
전공보다는 교양과목에 더 진심이었던 나는,
미학사나 생물학, 화학 같은 과목에선 늘 A+을 받곤 했다.
수학만 아니었다면 복수 전공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수학은, 내 열정을 언제나 발목 잡는 존재였다.
아마 그때 못 이룬 한을 평생을 들여서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들 사이엔 이과의 천재와 수재들이 많았기에,
그들 앞에서 조용히 작아졌던 내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세계대백과사전’은,
‘세계가정대백과’와 함께 그 시절 중산층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저 멋진 책 그 이상이었다.
나는 사진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 이미지들을 더 깊이 이해하려면 결국 텍스트를 읽어야 했다.
장편소설은 어려웠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이미지로부터 출발해, 필요한 만큼의 문장을 수확했다.
백과사전에 있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정독하는 어린이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다.
내가 늦게 태어났다면, 경이로운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보고 자라지 않았을까도 싶다.
브리태니커는 마치 금단의 열매 같았다.
이미 백과사전이 있는데 새로 사달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저 도서관 구석에서 먼지 낀 브리태니커를 만날 때면
어린 날의 갈망이 되살아났다.
세상 모든 지식을 품고 있는 듯한 그 두꺼운 책들.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경이롭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마 이것이다.
엄마의 친구 집, 그 집 언니 방에서 처음 마주한
아이보리색 양장본의 ABC 세계문학전집.
몇 권을 빌려 읽었는데, 다시 빌리러 가긴 어려운 거리였다.
읽고 또 읽었고,
읽지 못한 책들은 내 안에서 영원한 갈증이 되었다.
이 전집이 특별했던 건,
그 안에 담긴 세계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체코슬로바키아, 아르헨티나, 제3세계.
기성 전집들에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작가들과 작품들.
정치적 변혁, 국가 해체,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
인간 존재의 부조리, 사회적 책임…
그 모든 것이 책 속에, 문장 속에, 사람들의 얼굴 속에 박혀 있었다.
내가 느낀 충격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읽은 책과 비슷하다.
당시 학교에는 도서관이 없었다.
계단 층계참 아래 작은 창고에 오래된 책들이 쌓여있었다.
그걸 읽는다고 뭐라할 사람도 없어서
한동안 거기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책을 읽었었다.
거기서 만난 책이『제주 4.3』이다.
낯선 세계의 폭력과 억압, 그 안에서 생존하는 인간들.
그 세계를 '읽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통과의례 같았다.
ABC 전집에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돌아오는 밤』—
이런 작품들은 내 감각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 책들을 생각하면,
나는 한마리의 야생 늑대가 되어
눈발이 휘날리는 황야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어째서 그런 감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른의 세계를 살짝 들여다본 무기력한 어린아이라서 그랬던 걸까.
가끔은 엉뚱하게도,
어째서 대통령의 사진은 바뀌지 않고
늘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걸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
그건 나이도, 성숙도 아닌,
그런 세계를 읽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갈 수 없었던 때였다.
나는 여전히 정치나 경제에 흥미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 그런 세계에 자꾸 마음이 빼앗긴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나는 책을 사랑한다.
물론 지금도 장편소설은 잘 읽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지와 언어의 그 경계 어딘가에서
언제나 글을 읽고 쓰며,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책상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 글은
결국, 나를 형성한 전집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는
언제나 그 시절의 어떤 소녀로 되돌아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