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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민 큐레이터 Oct 20. 2021

08 직지, 금빛 씨앗 (상)

운명처럼 찾아온 직지

직지와의 첫 만남


2015년 겨울 12월, 런던의 한 후배로부터 소개받은 박우혁 아트디렉터가 ‘ 전시’ 기획을 제안했을 때다.

 펑퍼짐한 파커를 걸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나는 그를 만나러 가로수길로 나갔다.

“직지 아시죠?”

“직지심체요절이요?”

“네"

...

“예산이 얼마라고요?”


청주의 절에서 인쇄했던 인류 최고서(最古書)인 직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국제 페스티벌을 기획하는데,

큐레이터가 필요하다 했다.  청주는 일 년에 2-3억 예산으로 청주시민, 충청도민을 대상으로 수년간 문화행사를 해왔었다. 청주시가 마침내 “국제”적인 행사를 유치할 수 있게 된 것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 문화유산상 시상 행사를 유치하는 등 수년에 걸친  많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게다가 국제 행사는 국비가 배당되며 그 기준은 엄격하다.


2016년 9월에 8일간 있을 페스티벌에 가장 큰 예산이 전시를 중심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 전시 주제는 안 잡혔고, 총감독과 아트디렉터만이 정해진 상태라는 정도까지 알게 됐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던 나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지난 12년간 줄곧 달려온 전시기획을  중단하고, 오랫동안 미뤄왔던 박사 과정을 위해 약 9개월간 준비를 해오고 있었던 터였다.


아트 디렉터의 제안은 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완전 백지상태에서  10억 규모의 국제 행사를 큐레이터가 주제 설정, 기획 및 전 작업을 직접 감독 지휘하라는 것이었다.  즉 나의 큐레이토리 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수용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를 제안한 박디는 영국에서 인테리어 업무에 종사하면서 현대카드의 브랜드 마케팅 팀장을 맡은 흥미로운 백그라운드의 소유자였다.    

나의 망설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트 디렉터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서 내 뇌리 속엔 직지 전시기획에 관한 금빛 아이디어들이 돋아나서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큐레이토리 알 (curatorial)이란 큐레이팅에 관련된 모든 과정을 뜻한다. 즉 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개념 선정부터, 각종 연관된 리서치, 교육, 그 이후에 편찬, 아카이빙 과정까지 말이다.  



직지라?


“금속활자로 찍힌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그럼 금속활자임이 왜 중요할까? 최고임이 왜 중요할까?

그것이 왜 그리 중요할까? 일단 청주로 가보자


청주 자체를 처음 가봤다. 고속버스가 2시간쯤 달리니, 조금 썰렁한 북청주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박 씨는 택시를 잡더니 “청주 직지 지구"요 라 외쳤다. 다시 한 십분 달려, 조용한 도로의 우측에 내렸다. 고인쇄박물관은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눈이 한창 내린 터라, 아주 작은 바스락 거림도 눈에 덮혀진 듯 차분했다. 뒤에 나지막한 산이 고즈넉이  누워 있었고, 육교 건너에는  전시가 열릴 거라는 넓은 주차장을 갖은 청주문화센터가 보였다.


우리는 택시를 내려  고인쇄 박물관으로 들어섰다.

 출처: 중앙일보 최종원 기자


과학과 기술의 결합


디오라마와 그림, 그리고 나만한 인형들로 만들어진 주조법이 설명되었다.

어릴 적 민속촌인지 롯데월드에서 본 듯한 모형들. 첫 번째 칸은 상투를 튼 남자가 흰색 한복을 입고 양반다리 자세로, 낮은 탁상에 펼쳐진 화선지에 붓글씨를 쓰고 있다.


고인쇄박물관의 금속활자 제조법을 알려주는 여러 모형

서예의 장인들이 쓴 서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체를 선정해서 활자를 양각으로 판다.


           아름다운 서체란 밸런스가 맞는 글씨체 일 것이다. 눈에 보기 좋은 것은 간격과 굵기와 모양까지 꽤 주관적인 듯 하나, 아름다운 얼굴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워 보이듯, 글씨도 그렇다.
 

가장 아름다운 글씨가 간택되며 이를 얇은 밀랍에 데고 탁본을 뜨거나, 화선지를 붙인 채로 그 글씨 주변을 파낸다. ‘석삼' 자라 한다면 네모난 칸 안에 작대기 일자 셋만 남기고 그 주변을 파면, 밀 납 원래 표면 이자 글씨는 양각이, 그 주변 글씨를 둘러싼 공간은 그야말로 네거티브 스페이스, 음각이 된다.


그리고 그 단어 하나하나는 다시 봉에 붙여진다. 한마디로 가지 쇠를 만드는 것이다. 언뜻 보면 장기알 축소판처럼 생긴 조그만 조각이 다시 봉에 붙여져서 나무의 가지처럼 다닥다닥 흡사 가지를 뻗은 나무 형상을 연상시킨다.


밀랍에 글씨가 양각으로 파인 어미자가 봉에 연결되어서 마치 나무 모양을 하고 거푸집 틀 안에 안착되어 있다.


이를 둘러서 거푸집을 만든다. 이 과정이 가장 까다롭다고 한다. 즉 ‘문자 나무'를 둘러싼 타원형의 실린더 통 안에. 이를 황토와 모래를 섞어 만든 진흙을 부어 성형하게 된다.

모래가 많으면 점성이 약해지고, 향토가 많으면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듈을 20일 정도 건조한다.


청동을 붓는다. 활활 용암 같은 청동에 밀랍은 바로 녹아지고 거푸집만 남아있는데, 겉으로는 잘 보일 리 없다. 이를 살살 깨면, 금속 활자가 낱낱이 탄생하게 된다.

“어 폰트가 생기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폰트가 있었네?”  

 나는 마치 큰 비밀을 알게 된 거처럼 신기해한다.


이는 청동상 제조 시의 “로스트왁스” 기법과 동일한 것으로, 활자의 경우에는 그 크기가 작아 아주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었다. 즉, 직지는 바로 예술과 과학의 합작으로 아름다움과 기술의 완벽한 조화로 탄생될 수 있었다.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연구 덕에 할 수 있는 도전


사실 이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꼭 밝힐 것은, 이 글은 일개 한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서울대학 사범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를 찾기 위해 1955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67년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들어가 13년간 근무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직지를 찾아낸 박병선 박사님; 중요 무형문화재 제101호 금속활자장의 2대 장인이자 스승인 동림 오국진 선생으로부터 활자 주조의 원리와 기능을 사사한 임인호 활자장님; 내가 무지해서 모르는 많은 학자분들, 그리고 가까이서 많은 조언과 나의 무지를 감싸 안아준 청주시와 고인쇄박물관의 많은 학예사분들이 계셨다.



동아시아의 마지막 반도의 내륙 도시 청주. 이곳에 여러 스님들은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골라 책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활자를 만든다.  불공이었다. 그전까지, 팔만대장경처럼, 불경을 책으로 만들 때는 나무에 여러 자를 함께 새겼었다. 누군가 이 활자 하나하나를 개별적으로 만드는 발상을 했다. 마치 아기들이 놓는 알파벳 블록처럼 말이다. 닳지도 않게 청동으로 말이다. 이렇게 인쇄한 책이 구텐베르크가 처음이라도 전 세계가 알아왔는데, 어느 날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에서 구석에 처박혀있던 직지를 발견한다. 이는 1972년. 세계는 놀랬지만 정작 한국에서 큰 주목을 못 받았다. 유럽 '교과서'에서 배웠던 정설을 뒤집는 큰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2000년을 맞으며, BBC, 뉴욕 타임스 그리고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세계 모든 국제 언론에서도 금속활자 또는 가동 활자가 지난 1,000년간 세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에 하나라고 발표   있다. 중세시대는 오직 귀족 가문과 학자들만 정보를 얻을  있었는데, 이는 목판인쇄를 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속활자가 발명됨에 따라,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더욱더 빠르고 가속화되어 세계에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는 1984년에 청주에 이름 없는 절터가 발견되었고, 1985 청주대학교의 발굴조사에서  절이 바로 흥덕사로, 1377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백운화상 초록  조직 지심체 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인쇄한 곳임을 규명하게 되었다. 발굴 당시 주춧돌만 남아있던 금당을 1991 복원하였고 부지 안에 청주 고인쇄 박물관과 근현대 인쇄 전시관을 설립하게된다. 내가 그 추운 겨울에 직지를 만났던 그 곳이다. 청주시가 했단 페스티벌을 만들고, 기금모집하고, 연구하고, 복원한 수많은 노력에 나는 숟가락만 얹을 뿐이다. 오히려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직지의 의미를 (연이어) 세계로 알릴  있는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 나는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속 가능한 콘텐츠로서 세계무대 속에 직지를 부각하기 위한 방법은?  나는  화두를 붙들고 씨름하기 시작했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때 독일인이 최초로 영국 박물관장으로 임명되어 한창 유럽이 들썩였다.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은 “대영박물관”이라 한국에서 오랫동안 불리며 그야말로 “대영제국”의 자존심이 스며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독일인 수장을 임명한 것은 실로 파격적인 인사였는데 그가 내한했다 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로 그분을 만나 나눈 대화에서 나는 직지가 사실상 세계 속에서 인지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박물관장만 수년을 한, 인류 지성의 상징인 그도 직지에 대해 몰랐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직지가 연대적으로 볼 때 구텐베르크보다 100년 정도 앞섰는데, 구텐베르크가 이를 보고 활자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없을까?”라고.

“그것을 밝히는 게 너의 중요한 역할이 되겠네”라는 그분의 말에 나는 불현듯 내가 찾던 길을 찾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밝히는 것이 내 역할이 아닌, 누가 먼저 만들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가 또 다른 창조를 잉태한다는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의 발명품인 활자로 성경을 찍어 큰돈을 벌기 전에, 면죄부를 인쇄해서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때 인쇄된 바이블은 현재 대영도서관 등 주요 도서관에 소장된 서적 중 가장 중요한 책들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세계를 바꾼 것은 구텐베르크를 따라한 수많은 인쇄소가 유럽에 생겨났다는 것이다. 인쇄소 증가로 대량 출판 및 인쇄물이 가격 저하가 가능해졌으며, 이는 일반 대중들의 지식에의 접근성을 한차원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활자라는 인간의 창조물 속에서 또 따른 “씨앗”의  의미를 만나게 되었다.


박물관장님을 만나고 돌아온 자리에서 나는 다시 박우혁 아트디렉터를 만나 브레인스토밍을 계속했고, “ 직지에서 보았던 문자 나무가 중의적인 “씨앗” 같다”는 씨앗 타령을 계속했다. 활자가 실제로 씨앗처럼 작은데, 어떤 이들에게는 지식과 영예와 돈을 벌어드릴 수 있는 큰 나무의 조각임을 말이다.


“시드를 활용하면 어떨까? 뭔가 씨앗과 연계했어”


그러자 박디가 외쳤다.

“골드!!!!”


이유는 설명 안 했지만 나는 바로 이해를 했다!

알키미스트가 철로 만들고자 꿈꾸었던 “골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찾고 있던 의미가 , 바로 “금빛 씨앗”임을 알았다

그렇게 주제가 탄생했다.


마치 어린싹이 구텐베르크의 발명이고, 이가 큰 나무를 만들었다면, 직지는 어린 뿌리였을까?

그때 썼던 전시 프로포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있다.


"이 전시의 주제는 ‘직지, 황금씨앗’으로, 여기서 황금씨앗의 황금은 금속활자의 색을 대표하며, 또한 연금술사의 금빛을 상징하는 것 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씨앗의 배아가 직지를 형상화하여, 구텐베르크의 단단한 땅을 뚫고 새 싹으로 자라나 큰 나무가 되고, 각각의 가지가 기술의 진보, 혁명, 르네상스 등을 대표하는 멋진 대목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브랜딩의 귀재인 바디는 디자이너를 컨택해서 금속활자와 연금술사 태양의 이미지를 금빛으로 연결한 금빛 씨앗을 공식 EI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사실 또 ‘태양’의 의미까지 추가된다.

한자 날일 자를 보면 왼쪽 상단이 뚫려 있는데, 언뜻 보면 위아래가 정확하지 않아, 직지에는 3번의 오타가 존재한다. 만약 육안으로 식별이 불분명한 목판화와 금속 판화의 차이가, 이 오타로 인해 밝혀지는 것이다. 타이포가 발명의 순서를 판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됨이 너무 흥미로웠다.

전시 기획서에 넣었던 이미지, 날일자를 반듯하게 씨앗에 넣어봤다.

즉 날일 자를 보면 아래위 구분이 있는데, 실제로 직지를 보면 이 날일자가 세 번 거꾸로  인쇄돼 있다. 즉 이 '오타'는 목판화라면 가능하지 않은, 개별 금속활자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내겐, 마치 해를 품은 것 같았다. (배속에 아이가 거꾸로 있듯)



https://youtu.be/B1XJ2k6DFTY

하이라이트 - 준비 과정 및 관람객들을 볼 수 있다



김승민 큐레이터 (슬리퍼스 써밋 & 이스카이 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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