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그 숙제를 이루다
작가는 반드시 시대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현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고들 한다. 작가와 큐레이터는 다른 눈을 가진 걸까?
어찌 됐건 미술계에 엄청난 영향력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이기에, 매회 지긋지긋하다며 혀를 끌끌 차다가도, 베니스를 찾는 내 모습을 떠올리며 기획한 전시가 있었다. 그때는 2015년, 제 56회 베니스 비엔날레였다. 초대를 받지 않았지만, 겔리라/병행 전시로 나는 한국의 작가 8팀과 촬영팀 - 총 20여명이 베니스로 가서 겪은 그 모진 고생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만은, 오히려 그 고난이 서로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구심점이 되었는지, 서로를 격려하며 어렵게 꾸린 전시회였다.
하지만 기획자로서 아직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다.
2017년, 다시 베니스를 다시 찾았을 때 나의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다큐 제작작업을 착수조차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5년에 기획한 전시였지만, 2017년에 만나는 이들은 하나 같이 ‘작년’이라고 표현했다. 알다시피 베니스 비엔날레는 2년 주기로 열린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이 비엔날레가 주기인 24개월을 ‘1년’으로 기억하나 보다. 그만큼 미술계 종사자들에게 베니스 비엔날레는 강한 아우라가 있다.
우리는 그토록 불편해하면서도, 매 회 이토록 불편한 비엔날레를 위해 베니스 땅을 다시 밟게 되는 걸까?
베니스 비엔날레는 그야말로 미술계의 거물급 딜러, VIP들이 고용한 콜렉터, 메머드급 미술관의 큐레이트들의 집합장소다. 이 기라성들 앞에서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한다고? 나는 심한 자괴감으로 다시는 베니스를 찾지 않을 거라고 매번 되뇌곤 했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나에게 엄지척을 해보였을때, 나는 힘을 얻었다.
그런데, 나의 발은 또 베니스에 당도해 있었다.
이 모습은 끊임없이 좌절하면서도 포트폴리오를 큐레이터에게 보내는 미술작가들과 비슷할 거다. 미술계 종사자들에게 좌절과 희망, 자괴감과 만족감 사이를 수십 번씩 오가게 하는 자신만의 ‘베니스’는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베니스, 이상과 현실 사이> 전은 작가들이 왜 미술을 하는지, 작업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지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기획한 전시다. 영문 제목은 <Sleepers in Venice>, 제목에서도 가늠할 수 있는 두 개의 모티브는 토마스 만의 소설 <Death in Venice 베니스에서의 죽음>과 마크 왈린저의 작품 <Sleeper>다.
전시에 영감을 준 소설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내용은 이렇다. 지성과 교양의 상징으로 불리던 한 노년의 작가는 휴식차 떠난 베니스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미소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는 평생 동안 ‘이성의 절제’라는 미덕을 찬양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년 앞에서 노신사는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느끼며 무너진다. 소설 속 주인공인 구스타프 아셴바흐는 그렇게 콜레라가 창궐한 도시, 베니스에서 어린 소년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한다.
전시에 또 다른 영감을 준 마크 왈린저의 2004년 퍼포먼스 영상 작업 <슬리퍼 (Sleeper)>는 작가가 곰으로 변장한 채 베를린의 신국립미술관(Neue Nationalgalerie)에서 열흘 밤을 홀로 생활한 기록이며 이 퍼포먼스로 영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슬리퍼의 다른 뜻은 '잠복근무를 하는 스파이'인데, 이는 마스크를 쓴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분단의 현실, 그리고 임무를 위한 잠복이 영영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담아낸 작품이다.
또한, 곰은 숨기도 하고, 숨을 헐떡이기도 하며, 기진맥진하기도 한다. 심지어 지켜보던 관객에게 달려들어 겁을 주기도 했는데, 이는 '미술관'으로 대변되는 제도권 예술에 작가가 스스로 속박돼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는 작가의 태도, 현실의 작은 감정의 모퉁이를 날카롭게 갈아 관객을 향해 위화감을 주는 이 전시는 작가의 ‘개념’이 작품에 잘 표현된 사례다.
이 전시를 본 나는 마크 왈린져에게 기획 의도를 설명하며 내 전시에 참여를 요청했다. 그리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터너상 수상자이자 2002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되었던 것에 반해, 기획자인 나와 참여 작가들은 모두가 무명이었고, 그에게 전시 참여비도 지불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미술이라는, 전시라는, 작품이라는 아름다움에 이끌려 베니스에 갔다. 무모하게도 말이다.
(다큐멘터리를 완성해서 마크에게도 보여줘야 하는데…)
<슬리퍼>작품이 (사실은 작가가 변장한) 밤마다 미술관을 배회한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많은 사람이 그 광경을 보러 미술관으로 모여들었듯, 우리 전시장은 많은 작가들로 붐볐다. 다행히 오프닝 날 2천여 명의 미술관계자들이 몰리며 흥행했다. 기획자로서 안도의 숨을 쉰 순간이다. 2년 후 나는 베니스의 거리를 거닐며, 2015년 그날을 회상했다. 베니스에는 여전히 철새처럼 숱한 슬리퍼들이 떼지어 날아들고 있었다.
2년 전 <베니스, 이상과 현실 사이>전이 예술의 고통을 알면서도 결코 예술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의 숙명을 보여준다.
언젠가 숙제를 해야할텐데... (2017년 글)
위의 글을 쓰고, 1년 후, 나는 숙제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약속은, 바로 작가들에게 약속했던 다큐멘터리를 세상에 내어 놓는 거였다.
처음 시작은 막막했다. 먼저 하드 드라이브에 잠자고 있는 2 테라 바이트의 기억을 소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2주 동안 집에서 거의 안 나가고, 녹화된 동영상들을 봤다. 내가 아는 장면도 있었지만, 처음 본 장면도 많았다. 촬영팀과 감독님들이 각자 카메라를 들고 작가들을 따라다녔기에 여러 명의 다른 시선들이 모여있었다.
이 방대한 기록을 어떻게 해야 한다.
그러다 나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영상이 있었다.
"사전 인터뷰"
"3년 후에 어떤 모습일 거 같아요?"라고 질문이었다.
최민영 감독과 방아란 조감독이 진행했던 한국에서의 인터뷰였다. 작가들은 하나같이
"별로 안 변할 거 같은데요.. 똑같을 거 같아요, "라는 대답을 했다. (물론 앞으로의 기대에 가득 찬 구혜영 작가도 있었지만) 그때의 "3년 후"가 내가 그 동영상을 보고 있던 시기였다.
나는 다큐 시놉시스를 그 자리에서 쓰기 시작했고, 이를 최 감독님에게 보낸다. 이메일을 뒤져보니 2017년 12월 19일 글이다.
내 (하찮은) 아이디어는 이랬다:
3년 전 찍어놓은 여러 전시 준비 영상을 보며 나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작가가 이어받는다. 그러다가 한 관람객의 시선, 마지막 감독의 시선으로 영화의 footage를 엮는다는 것이다. 옴니버스처럼 만들자는 생각이엮다.
c47를 운영하고 있는 최민영 감독에게 (2015년 전시 당시 촬영팀을 기획해서 함께 베니스에 갔다) 내가 1차 편집을 하겠다고 했다. 마침 장혁준이라는 프로그래머 친구가 있다고 소개를 받았다. 게다가, 우리와 한께 베니스를 가서 정말 "영화 살림은 이 정도구나" 하고 그 철저함에 놀랐던 이서현 (엄청난 프로듀서가 될 거라 믿는다) 팀장이 "피디님 (나를 큐레이터가 아닌 피디님으로 부르는 몇 안 되는 이이다) 제가 도울게요", 하고 나섰다. 그렇게 2017년 12월과 2018년 1월은 편집실에 매일 출근하며 편집을 하기 시작했다.
1차 편집이 끝난 뒤, 마이더스 손인 최민영 감독에게 넘겼다. (아주 긴 버전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후반 작업에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 그리고 배경음악도 직접 작곡을 의뢰한 곡들로 넣고 싶은 욕심까지 생겼다. 플럭서스 음악 김병찬 대표님께 SOS를 했다. ADOY, 엘사&한, 임소영, 디글루&이윤정 이렇게 영화 가편집본을 보내며 소정의 작곡비를 약속하고 크라우드 펀딩에 들어갔다.
텀블벅 펀딩 목표는 3천만 원.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는 법.
펀딩에 실패하면 사기꾼으로 전락되거나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 있다. (이 조그만 다큐멘터리도 그런데, 정말 한국 영화계에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부모님까지 총동원해서 여기저기 부탁부터 협박까지. 위지윅 대표님과 몇 명의 숨은 조력자의 힘과 100여 명의 친구들의 덕택에 3천만 원은 겨우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만든 음악들은 아직도 스포티파이에서 즐겨 듣고 있다. 한국이라면 멜론과 같은 음악 스트리밍 최대 플랫폼이다.
게다가 역시
마법의 손.
최감독의 손을 거친 영화는 조금씩 재밌어졌다.
미치도록 얄미웠던 한 작가는 오리려 "약방의 감초"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색보정을 하기 전, 그 흐릿한 영화 3차 본을 저장하고, 영국에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처음 90분 길이 영화를 보다가 마지막 부분, 장건호 감독이 찍은 빈 전시실의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다 사라진 이 작품들을 이렇게 담아 줬구나.
그렇게 숙제를 했다고, 다시 회상해서 써본다.
이 전시와 영화 이름에서 "꿈을 꾸며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 잠복 근무를 하는 이들"의 모임 슬리퍼스써밋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 중심에 소중한 인연이 있다.
영국에서 크라우드 펀딩 하는 도중 ,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문화 경영으로 석사를 하고 있는 도연희와 영국에 워킹 홀리데이를 온 이혜원을 만난다. 혜원은 대구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지금 근무 중이고, 연희는 지금도 나와 많은 일을 함께 하는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다. 지금도 문서와 사투를 버리고 있는 연희에게 "곧 좋은 날이 올 거야"라고 또 말해본다.
늘 공수표를 미리 날리는
김승민 큐레이터
(슬리퍼스 써밋 & 이스카이아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