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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민 큐레이터 Oct 20. 2021

07 3년 후, 어느 노병의 이야기

민들레 씨앗이 나에게 다시 오다. 

<과거로부터 온 선물 (2010)> 전시의 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는 노병의 이야기 (2013)> 전시는 사실 나의 석사 시절 기억과 연결된다. 때는 2003년, 유니버시티 컬리지 대학 옆에는 런던 대학 공용 도서관이 있었다. 그 날두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오는 길이였다.

 

대략 10가지 정도의 책들을 힘겹게 들고서, 문을 못 열고 헤매는 나를 보고, 한 노인이 문을 열어준다. 그 노인의 얼굴은 내 머릿속에서 카멜레온처럼 다양하게 회상되어 더 이상 뚜렷하지 않지만, 분명 그는 나를 아는 듯한 인자한 얼굴로 내게 한국인인지 물었다.


당시 런던에 한국인이 많지 않았기에, 더욱 반가웠으리라.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는 잠시 바닥에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책들을 움켜쥔 내게 자신의 지갑 속 흑백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흑백 사진 속에는 젊은 그가 있었다. 그와 함께 서있는 사람들은 분명 한국인들이었다. 그 할아버지가, 우리 부모님이 태어나실 무렵에 한국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영국 왕립 보병연대를 도왔던 한국인 자원봉사자들, 1951
알란 가이, BKVA (British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총무가 한국전쟁 참전시 사진

알란 가이는 한국참전용사 행사를 늘 나서서 도와주신 참전용사다. 그가 이 사진을 보내줬고, 이 사진은 나의 Fragments 영화에 사용했다.


-      그 할아버지를 찾고 싶었다.


처음  ‘과거로부터 온 선물’을 기획하였을 때,  어떻게든 할아버지에게 이 소식이 닿았으면 했다. 

민들레 씨앗처럼 살포시 말이다.


그래서 보내졌던 소중한 선물이 바로, 생존하는 모든 참전용사에게 보내졌던 40장의 엽서이다. 

<Present from the Past> 전시에 출품된 작품으로 만들어진 엽서들. 

약 8만 장을 인쇄해서, 40개의 작품 사진이 하나씩 다 들어갈 수 있도록, 세트로 만들어, 살아계신 참전용사 분께 하나하나 보내졌다. 정확히 말하면, 전시를 위해 새로 만든 작가들의 작품들로 만들어진 엽서들이다.


당시 문화원의 영국인 직원 폴 웨이디는 영국 전역을 뒤져서 브리티쉬 리즌을 연락해 살아계신 참전 용사들 주소를 모으기 시작했다. 참전용사들의 기록은 한 곳의 중앙 데이터 베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별 관할 부서에 등록되어 있었기에 연락처를 찾는 데에만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유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약 2천 명의 주소에 봉투 작업을 해서, 이 엽서들을 다 발송했다. 폴이 (지금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다, 자주 보진 않아도..) 그 주소들을 하나하나 찾고, 봉투 작업을 하면서 문화원 갤러리 중앙실 전체에 쌓아놓고 작업하던 사진이 기억난다. 노병이 받게 될 그 봉투 안에는, 그들이 60년 전 서있던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들의 작품이 그려져 있다. 그 엽서들 40개 중 몇 개는 냉장고에 붙여지고, 몇 개는 손자 손녀에게 갈 수도 있다. 그냥 서랍 속에 있던 그 엽서들을 짐을 정리하던 딸이 이 보고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붉힐 수도.. 작가들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Thank you를 했던 그 아름다운 유산들이.  민들레 씨앗처럼 그들의 유산 위에 또 뿌려질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3년 후, 나는 문화원을 나와 이미 2년 동안 이스카이 아트라는 기획사를 운영해오고 있었다. 2012년에 리버풀 비엔날레 도시관을 맡으며 인천과 연계한 <테라 겔럭시아> 전시를 맞히고,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 미디어 전시도 준비 중이었다. 그러다 잊고 있던 이 엽서를 보게 됐다. 나는 그 민들레 씨앗이 먼 훗날 누군가를 움직일 주 알았는데, 나 자신을 흔들었던 것이다. 2010년 전시장에 와서 좋아하시던 베테랑 할아버지들이 생각났다. 18세부터 참전할 수 있었던 전쟁을 16세인데 속이고 나갔더 하더라도, 60년이 흘렀으니 가장 어리서도 76세. 게다가 지독히 추운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로 고생을 하시는 분도 많이 봤다.

게다가 평균 80대의 베테랑 생존자 수는 하루가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3년이란 시간은 - 2010년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었다면,  그 후로 3년 후는 2013년은 종전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 어제 봤던 노병을 그 다음날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긴 시간이다.


그러다가 설마리 전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설마리 전투는 글로스터 고지 전투 혹은 임진강 전투(Battle of Imjin River)로 불린다. 이는, 한국 전쟁 중,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임진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51년 3월 수복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임진강 지역을 공격했다. 이때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주로 영국군으로 구성된 제29보병여단에 의해 방어되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에 맞서 29 보병 여단단은 이틀간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기세는 무뎌졌고, 유엔군은 후퇴하여 서울 북부에서 방어를 준비할 수 있었다. 글로스터 연대의 제1대대는 235 고지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이 고지는 글로스터 고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글로스터 대대는 '후퇴는 없다'는 뜻으로 앞과 뒤에 벳지가 달려있는 모자를 쓰는데,  제29보병여단이 설마리 전투에서 보여준 저항은 영국 군사사와 전통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또한 나는 노병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래서, 작가들과 함께 그들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 친한 친구 중 버클리 성의 성주가 있었다. 찰리 버클리는 버클리 가문으로, 영국에서 한 가문이 지킨 가장 오래된 성인 버클리 성을 물려받아 여러 가지로 애쓰고 있었다. 그 성은 “설마리 전투”로 유명한 글로스터 사단이 위치했던 그로스터셔에 있다.

버클리 가문이 900년 이상 상주해온 버클리 성. 2013년 전시 준비 당시 자주 왕래를 했다.

찰리는 성에서 전시 함에 찬성을 했고, 나는 작가들과 성을 오가며 (런던에서 약 3시간 걸린다) 펀드레이징을 했다. 그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금이 확정되었다. 제목은 <어느 노병의 이야기>.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전시를 포기하지 않고 추진하기 충분했다.


게다가 우연한 기회로, 파주시에서 글로스터셔시 (Gloucestershire)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어, 시장님과 관계자들을 글로스터 성도 보여주고, 지금은 반으로 나뉜 글로스터 연단도 만날 수 있었다.


왕립 포대와 글로스터연대의 한국참전용사 Royal Artillery and Gloucester Regiment

그렇다면 노병들을 만난 작가들은 어떤 작품을 구상했을까.


아나 백 (Anna Paik)은 유럽식 초상화 전통회화 기법을 간직한 작가로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주최 초상화 대회에서 수상했으며, 영국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초상화를 커미션 받아서 진행한 것을 본 바 있다. 데이비드 캠슬러의 얼굴은 그럼 누가 기억해 줄까? 나는 그녀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나는 내게 그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데이비드도 만나고, 오랜 시간에 걸쳐 위의 사진을 완성했다.

그의 초상화에는 그가 백두산 앞에 앉아있다. 그리고 흐릿하게 그의 젊은 날의 얼굴도 보인다.
조선일보에 실렸던 사진에는 데이비드가 그의 초상화 앞에서 웃고 있다.
(그는 아직 건강할까? 전화를 해보면 되는데 겁이 난다.)


데이비드에게 내가 한국의 변한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는 너무 놀래며 자신을 "마법 양탄자"로 한국에 데려다줄 수 있냐고 말했다. 그는 이제 노쇠하여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없기에.. 

전시 보도 기사, 한국전 참전용사 데이비드 캠슬러가 한국 작가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 김미리 기자) 


아나 백, 데이비드 캠슬러 OBE, Oil on Linen, 110 x 97 cm, 2013

권순학 작가는 데이비드 집에 주목했다. 빽빽하게 걸린 사진들과 훈장들, 여기저기서 모은 듯한 다양한 영국 왕실 관련 기념품이 무수히 걸려있는 집은 하나의 개인 박물관 같았다. 본래 권순학은 빈 벽, 예를 들면 하얀 벽과 같은 무의의 공간을 찍은 일련의 작업을 해왔었다. 작가와 오랫동안 잘 알아왔기에 늘상 호흡을 하고 서로의 성향을 잘 알면 편하게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곤 한다. 나는 권 작가와 함께 만약 데이비드가 세상을 떠나면, 사라질 그 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권 작가의 전 작품이 미니멀한 갤러리의 하얀 벽 - 전시 후의 그 텅 빈 벽을 찍은 - 개념 사진이었던 걸 알고 있기에, 어려운 부탁이었다. 하지만 여러 사진의 모서리가 중첩된 아래의 설치 작업으로 권순학 작가는 해석을 해냈다. 

권순학, Work for A Solider's Tale, 2013 
원지호, Construction for Deconstruction, 1010 x 74 x 74 cm, 2013

원지호 작가는 공사장에서 흔하게 쓰이는 재료로 권위적인 깃발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가변적인 형태의 깃발 작업을 만들었다. 위의 사진은 당시 전시장이었던 아시아 하우스에 원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이다. 


아.. 여기서 살짝 빠진 이야기가 있다!


전시가 한창 준비 중일 때 북한의 도발 미사일 도발 뉴스가 영국 언론을 도배했다. 결국 버클리 성은 전시 개최 의사를 취소했다. 도통 사정을 해보아도, 북한과 관련된 이미지를 성에 투영할 수 없다는 관리위원회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성주라도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표했다. 나는 절망했지만, 바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아주 운이 좋게 아시아 하우스는 마침 전시관이 희망하는 기간에 비어있었다. 그리고 지하 전시실 외에 새로운 야외 전시장이 증축되고, 1층과 2층을 사용할 수 있다면 큰 전시가 가능했다. 

아시아 하우스는 런던 중심에, 새로이 이사한 BBC 본사 바로 길 건너편에 있는 유수 문화 기관이다.
결국 작가들에게도 양해를 구했지만 아시아 하우스의 베뉴 비용을 충당하기에 너무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 한국에 방문을 했다가 여러 분께 어려움을 말씀드렸다. 때마침 종전 60주년은 한영 수교기념 130주년이기도 했고, 따라서 외교통상부의 도움을 받아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부제는, <60년의 기억, 130년의 우정> 


https://www.youtube.com/watch?v=VZL9uO7JHac&t=57s


게다가 2010년 <과거로부터 온 선물> 취재를 하며 친해진 미샬 후사인이 개막 사회를 봐주기로 했다. 버클리 성일 경우 이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이기도 했다. 개막식에 참석할 예정이던 참전 용사들이 찾기엔 훨씬 수월 했기에.

데이비드 캠 슬러 같은 분들은 혼자 찾아오기 어렵기에, 같이 일하는 전시 스타프가 모시러 갔다. 


더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글로스터 성에서 설마리 전투를 기념하는 의미로 시작했던 작품 3가지를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고 싶다. 설마리 전투는 고립된 상태에서 글로스터 대대 59명이 전사하고 530명(장교 21명 사병 509명)이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포로 중 153명은 부상자였다. 글로스터 대대가 설마리 전투에서 큰 인명 손실을 보았지만, 사흘간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유엔군은 후방 전열을 재정비해 중공군의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작가들과 나누었는데, 윤석남 작가 -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이자 페미니스트 화가 1세대이다 - 는 이들의 얼굴 하나, 하나를 500개의 나무에 그렸다. 


그리고 그 얼굴 사이에 원지호 작가가 만든 합성고무의 "기념비"를 새기어 바닥에 놓았다. 과거의 영웅 중심적인 전쟁의 역사를 수평적인 과정으로 펼쳐보고자 한다는 의미. 고무는 전쟁의 부산물로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기 위한 가장 생산적인 대표적인 재료이기도 했다 한다.  

원지호, From one Point of View (고무판)과 윤석남, 500- Returned, 2013 

부활을 상징하는 동양의 연꽃 작업을 많이 하는 최정화 작가에게 이번엔, 영국에서 참전용사를 기 리는 양귀비 꽃을 만들어 줄 수 있느냐 물었다. 그렇게 500 송이의 붉은 양귀비가 영국에 다시 폈다. 


최정화, Winter Garden, 2013


김승민 큐레이터 (슬리퍼스 써밋 & 이스카이 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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