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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파니 Feb 14. 2024

바르셀로나의 밤은 낮보다 선명하다

40일간의 배낭여행 여섯 번째 행선지

1. 공항에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정들었던 피렌체를 떠나는 건 아쉬웠다. 5일여 만에 사랑에 빠진 이탈리아를 뒤로하고 내가 그토록 기대하던 스페인으로 향했다. 한 달 동안의 유럽 배낭여행 중 가장 긴 시간을 계획해 둔 나라이기도했다. 일정표 다섯 도시 속 그 첫 번째는 바로 가우디와 해변과 축제와 츄러스의 도시, 바르셀로나. 


도착하니 해는 이미 어둑어둑 저물고 있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숙소 주변에 내렸다. 초저녁의 하늘과 연노랑 가로등의 완벽한 조화.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도시의 내음에 빵빵 경적소리가 화음처럼 쌓인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시작들에 두둥실 들뜨는 마음. 새벽 한시면 대부분의 술집이 문을 닫는 유럽대륙 내에서 스페인은 거의 유일하게 새벽 7시까지 파티를 해대는 나라였다. 그 명성을 느껴보고자 일부러 파티 프렌들리로 예약한 호스텔의 로비는 바닥부터가 네온이었다. 감기기운이 있어 오늘은 일찍 자겠다는 말에 감기는 데낄라로 치료하라는 스텝의 유혹을 뿌리치고 들어왔다. 금방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건축에는 조예가 없는 탓에 가우디 투어는 첫날 몰아서 다 끝내버렸다. 눈을 비비며 새벽같이 나간 투어에서 카사 바트요와 카사 밀라, 그리고 구엘 공원을 둘러보았다. 앙상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기둥이 받치고 있는 그의 건물들은 고래의 입 속 같기도, 해골 같기도 했지만 음산한 기운보다는 태양을 더 많이 머금고 있었다. 그의 건축물 중 가장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지 삼일이 지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여전히 부지런히 쌓아 올려지고 있는 거대한 성당에 발을 들였다. 수많은 인파에 정신없이 통로를 지나 메인홀에 들어간 것도 잠시, 발에 빨갛고 노란 동그란 것들이 차여 무심코 올려다본 천장에선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유럽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한 블록 건너 있는 게 탑이고 성당이라는 걸. 종교가 없음에도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들 아래 고요한 공간에 머물다 보면 절로 차분해지지만, 두세 개쯤 보고 나면 다음 성당은 패스하기 일쑤다. 나 역시 여행 일주일쯤부터는 성당들은 모두 건너뛰었으니깐. 그럼에도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천장을 메운 스태인드글라스는 책에서 무수히 많이 봐왔던 것이지만 사진은 절대 실물을 담을 수 없었고 비로소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말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2. 스페인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 나 역시 부지런히 빠에야를 먹었다. 물론 스페인을 대표하는 음식이어서도 맞겠지만 빠에야 자체가 매우 흔하기도 했다. 마치 한국의 김치볶음밥 내지 돌솥밥처럼, 코스메뉴에 종종 껴있었고 맛은 우리가 아는 익숙한 그 맛에서 조금 더 맛있는 맛. 


그날은 호안미로 미술관에 가기 위해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남유럽의 뜨거운 햇살 아래 반짝이는 풀, 꽃, 고양이 같은 것들에 홀려 걷다 문득 끼니때를 놓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곧바로 구글 맵을 켜 주변 식당 중 대충 평점 괜찮은 한 식당에 들어갔다. 관광객은 나 혼자, 로컬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다수였고 분위기와 손님들과 메뉴로 미루어봤을 때 딱 들었던 생각은 ‘아 여기가 기사식당이다!' 주방장의 점심코스인 ‘메뉴 델 디아’가 단돈 12유로였다. 여기에 애피타이저+메인+디저트+주류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 참으로 푸짐한 인심이다. 어설픈 스페인어로 떠듬떠듬 주문에 성공한 나는 애피타이저로 빠에야를 골랐고 곧이어 레몬맥주와 함께 아담한 그릇에 서빙된 빠에야는 엄청나게 특출나진 않았지만 어딘가 익숙하고 편안했다. 마치 스페인 남부 어느 시골마을에 사는 고모할머니가 해줄 법한 음식이라며, 있지도 않은 허구의 인물까지 들먹이게 되는 맛이었다.

넘칠듯이 따라주신 끌라라에서 보이는 스페인사람들의 인심

배를 채우고 호안미로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봤다. 예술기행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일 만큼 이번 유럽여행에선 정말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과 갤러리를 다녔지만, 그중 호안미로 미술관은 기억에 남는 곳 중 한 곳이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하얀 미술관 건물이 주변 식물들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고, 내부 호안 미로 컬렉션과 더불어 스페인 현대미술 작가들의 특별전은 관객친화적인 설명을 옆에 써붙인 채 편안하게 걸려있었다. 평소 호안 미로의 작품을 좋아하던 나에겐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청록과 남색을 유독 잘 썼던 그의 붓터치를 열심히 눈으로 좇으며 오후의 무더위도 잠시 마음이 청량해졌다.

여기까지 들으면 완벽한 하루 그 자체. 하지만 나에겐 하나의 일정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깜짝 데이트!


전 날, 바르셀로네타 해변에 선탠 하러 가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 한 남자가 있었다. 내가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공부하는 학생인 줄 착각했던 그는 자기도 여기서 공부하는데 내가 마음에 든다며 소셜을 교환하자고 했다. 평소 같으면 쉽게 응하지 않았을 제안인데, 점심때 먹은 와인 한 잔 때문인지 손에 든 뜨거운 추로스 때문인지 신나 있었던 나는 이것 또한 여행의 즉흥성이라며 흔쾌히 소셜 아이디를 건네줬고, 우리는 이튿날 몬주익 분수 앞에서 선셋을 함께 보기로 했다. 호안미로 미술관에서 몬주익 미술관 까지는 도보로 이동가능 했고, 열심히 걸어간 탓에 약속시간 보다 삼십 분 일찍 온 나는 주변 박물관도 기웃대고 버스킹도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왔다. 느끼한 미소를 흘리며 다가오는 그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어 내가 어제 술에 취했나?’ 

믿기 힘들 정도로 인상이 달라 조금 당황했지만, 백주대낮에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사람 역시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버스킹이 한창인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지만 불행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듯, 농담인 듯 아닌 듯 불쾌한 이야기를 자꾸 꺼내는 그가 불편했다. 더군다나 먼저 데이트를 신청했음에도 밥 먹을 식당을 왜 미리 안찾아봤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그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졌다. 결국 해가 어둑어둑 해질 때쯤, 슬슬 밥을 먹으러 가자는 그에게 얘기했다. 

미안한데 나 집에 가고 싶다고.


호스텔에 돌아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 진작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그랬냐며 내 망한 데이트 일화에 심심한 위로의 말을 던졌다. 글쎄,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나에게 ‘자리를 중간에 박차고 나온다’라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예의를 지키고 싶은 마음 반, 혹시라도 해코지할까 봐 무서웠던 마음 반이었다. 우리나라여도 똑같았을 것이고, 우리나라여서 똑같았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들면 내가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된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바르셀로나에서 배웠다. 내 인생 가장 망한 데이트였지만, 하나라도 남겼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 외에도 일주일동안 머물면서 생겼던 재밌고 가슴 뛰던 일화들이 많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마치 데킬라 샷을 들이키는 것과 같아서 매번 생각날 때마다 목부터 뜨끈해지곤 한다. 그래, 그곳의 밤은 분명 낮보다 선명했음을 나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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