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의 배낭여행 네 번째 행선지
1. 로마에서의 마지막 아침.숙소 주변 카페에서 까놀리와 에스프레소로 속을 데운 다음, 이른 아침 부지런히 기차에 올라 피렌체로 향하는 길. 피렌체 배경의 명작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려고 담아놨으나 자막 없는 버전으로 저장하는 실수에 그만 초반 5분 보고 옆으로 치웠다. 꿩대신 닭이라고 대신 ost를 반복재생했다.
도착한 피렌체는 생각보다 작은 도시였다. 호스텔까지 걸어가는 길은 좁고 길었고, 몸통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나는 영락없는 관광객이었다. 체크인을 하러 로비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하마터면 피렌체 첫날부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뻔한 것을 간신히 면하고 입성한 호스텔은 혼성 12인실이었다. 믹스 도미토리가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다인원은 처음이라 약간 긴장하며 문고리를 돌렸다. 오후 세 시쯤 어중간한 시간, 방엔 아무도 없었다. 짐을 풀고 간단히 화장을 고치는데 덜컥 열린 문과 비에 쫄딱 젖은 채 걸어 들어오는 빨간 머리 여자애. 에바와 나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에바는 타투이스트였다. 캐나다인이지만 현재는 멕시코에 머물고 있는 살고 있는 그녀는 타투 장비를 들고 각 나라의 도시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일을 했고, 종종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그곳 미술학교의 계절학기를 등록해 몇 주 동안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도시가 피렌체였고, 덕분에 우리가 만났다. 젖은 머리에 물기를 털며 우리는 대화를 시작했고, 우피치 미술관에 갈 거라는 나의 말에 자연스럽게 에바가 신발을 다시 신었다. 여기 온 지 일주일이나 되었는데 아직 피렌체에서 제일 유명한 뮤지엄에 가보지 않았다니, 이건 너와 함께 가라는 신의 계시야.
하필 그날은 이탈리아의 국경일이었고 덕분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꼼꼼히 보면 4-5시간은 훌쩍 지나간다는 우피치였고 나는 오로지 우피치만을 위해 피렌체 일정을 잡았지만 어쩐지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방금 사귄 친구랑 이야기하는 게 더 재밌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앞에 두고 우리는 심심찮은 농담을 던졌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상 옆에서 포즈를 따라 하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마치 5년은 사귄 친구처럼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렀고, 피렌체는 내게 금세 친숙한 도시가 되었다.
우피치에서 폐장시간 몇 분 안 남기고 나와 우리는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호스텔 단체챗룸에서 같이 선셋 볼 사람들을 구해뒀는데, 에바의 같은 방 친구들 (이제는 내 룸메이트이기도 한)도 합류하기로 해서 금세 큰 그룹이 만들어졌다. 독일, 미국, 캐나다, 멕시코, 싱가포르 각 나라에서 날아온 사람들이 오로지 오늘 이 자리에서 선셋을 보고자 모였다. 노점상에서 미니 마르게리따와 맥주를 사들고 우리는 성벽에 걸터앉았다. 피렌체 첫날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본 노을은 내 인생에서 본 것 중 가장 흥겨운 노을이었다. 뒤로는 버스킹 음악이 흐르고, 내 옆에는 소란스레 통성명을 하고 동일 관심사를 찾는 친구들의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방 안이 아닌 방 밖에서 먼저 만나게 된 룸메이트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프렌들리 한 친구들이었고, 나이대도 다 비슷해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어 여행을 함께하게 되었다.
해가 넘어간 뒤에도 한참을 앉아있다가 우리는 베키오다리를 건너 시내로 돌아왔다. 왜인지 나는 엄청난 익숙함과 편안함을 그곳에서 느꼈다. 한국과 열네 시간 떨어진 이탈리아 어느 도시 다리 한복판에서 마치 전에 와본 것 같은 느낌을 수도 없이 받으며,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 위를 열심히 걸었다.
2. 친퀘테레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에바와 두오모 앞에서 다시 만났다. 피렌체에서 3일만 머물기로 세워둔 내 계획이 야속하고, 에바와 이렇게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 시내 기념품샵에서 하트모양 사탕꾸러미를 사 그녀에게 건냈다. 나도 멕시코에 갈 계획이 있어서 거기서 꼭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담아. 까르보나라에 로제 와인 곁들여 웃고 떠들다 나머지 호스텔 친구들과도 작별인사를 하러 가라오케에 갔다. 2000년도 팝송을 목청 높여 따라 부르다 동트기 직전 가게에서 나오니 예고 없는 새벽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장미를 파는 아저씨가 골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친구가 사준 장미를 들고 우리는 두오모 성당을 향해 달려갔다. 빗속에서 장미꽃을 들고 춤추고 노래 불렀던 피렌체의 마지막 새벽.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나게 친해진 친구들 덕분에 3일이지만 마치 오랫동안 거기 살았던 것 처럼 강한 애착을 느꼈던 도시. 몇 개의 나라와 도시를 다녀온 뒤에도 피렌체는 내 마음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