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의 배낭여행 두 번째 행선지
1. 뉴욕에서 밤비행기를 타고 7시간을 날아서 도착한 샤를 드골 공항은 여느 때와 같이 북적였다. 이번 여행에서 프랑스는 후보군에 없었는데, 뉴욕-로마 직항 비행기보다 30만 원이나 싼 유혹적인 옵션에 넘어가 파리에서 16시간 레이오버를 하기로 했다. 작년 여름 파리 여행이 선물해 준 소중한 기억들로 하반기를 살았던 터라 내심 설레는 마음을 안고 두 번째로 파리 땅을 밟았다.
저번에 만들어둔 나비고를 챙겨 온 덕분에 여느 관광객처럼 긴 줄을 서지 않고 한 번에 파리 시내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뾰족뾰족 반짝반짝한 맨해튼 빌딩 사이를 걸어 다닌 게 바로 어제의 일인데, 오늘은 파리 한복판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묘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파리 시내에서는 어림잡아 열 시간쯤 보낼 수 있었다. 한정된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 평소 궁금했던 향수 브랜드의 매장에 갔다. 직원에게 여름휴가를 위한 향수를 찾고 있다고 하니, 파도를 연상케 하는 씨 노트의 시원한 향을 추천해 줬다. 여행용 공병에 담긴 작은 향수를 사 그 자리에서 바로 뿌렸다.
가게에서 나와 파리 여행 중 가장 좋아하던 장소인 보쥬광장에 갔다. 흰 셔츠를 돗자리 삼아 잔디밭에 깔고 잠깐 누워있는다는 게 아예 낮잠을 자버렸다. 그러라고 있는 광장이니 아무래도 괜찮았다. 파리에서 내가 그리워하던 건 이런 여유였다.
2. 짧지만 알찬 파리 나들이를 끝내고 공항으로 돌아오니 시간은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로마로 떠나는 비행기는 7시간 후인 오전 6시에나 보딩할 예정이었다. 애초에 공항 노숙을 염두하고 있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샤를 드골 공항을 돌아다니다 보니 소파와 콘센트가 있는 작은 라운지에 사람들이 모두 몰려있는 걸 발견했다. 나란히 옆에 짐을 두고 자리를 잡았다. 24시간 편의점과 카페가 있는 인천 공항과 달리, 샤를 드골 공항의 밤은 아주 고요했다. 작은 소파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사람들과 충전기를 꽂아두고 찌푸린 표정으로 핸드폰을 응시하는 사람, 작은 목소리로 가족과 통화하는 사람까지 각자 방식은 다르지만 터무니없이 이른 비행시간이라는 한 가지 공통점으로 이 작은 라운지에 발이 묶였다. 준비해 온 변압기가 콘센트에 잘 들어가지 않아 끙끙대고 있을 때, 앞에서 자기 쪽 콘센트에 꽂아보라는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콘센트가 문제였던지 다행히 충전기는 잘 작동했고, 얼떨결에 그 남자와 통성명을 했다.
“어디 가고 있어?”
“로마. 뉴욕에서 왔는데 파리에서 레이오버하는 일정이었어.”
“오 그렇구나, 나는 볼로냐로 가. 거기 살거든. 출장차 파리에 들렀어.”
맞은편 남자는 볼로냐에서 온 댄서였다. 자기 분야에서는 꽤 유명한 지 전 세계 이곳저곳으로 레슨과 공연을 다니며 활동하고 있었다. 친화력이 엄청난 남자가 급기야 SNS를 켜 한국으로 출장 갔을 때의 사진을 보여줄 때, 옆자리 여자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요리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여자는, 지금은 파리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는 셰프였다. 죽어도 가지 않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우리 셋은 그렇게 미지근한 유대감을 느끼며 대화를 시작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오히려 술술 말이 나갈 때가 있다.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파리 공항에서의 밤이 딱 그랬다. 두 사람 다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싱글 라이프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었고, 타지에서 갑자기 언니 오빠가 생긴 듯한 느낌에 철없게 질문을 쏟아냈다. 바보 같은 질문을 다 받아주며 둘은 도대체 어쩌다 새벽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냈고 셋 다 내리는 사랑의 정의는 달랐으나 이야기의 종착역은 결국 하나의 질문.
“그래서 사랑이 뭘까?”
상상해 보라, 한때는 영원을 약속할 정도로 애정하던 사람이 점점 거짓말을 하고, 나보다 타인을 우선순위에 두고, 서로에게 비치는 자신을 더 이상 가꾸지 않는다고. 현실을 부정하기도 탓을 해보기도 하다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욱 그 사람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두 사람 다 이별을 결심했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라 둘 다 슬퍼 보이거나 주저하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돌아간다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지난 선택을 부정하거나 구태여 숨기지 않는 그들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사랑이 끝나도 남는 것들이 있다.
눈앞에 닥친 번쩍이는 사랑 앞에서 마음의 변동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음에는 오답노트가 없어서 어떤 관계도 정답이 될 수 없고 오로지 수많은 참고문헌만 있을 뿐이다. 심지어 내 지난 경험들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고 세상엔 같은 사람이 없기에 ‘이번엔 다를 거야’라고 나를 합리화시키기란 너무 쉽다. 상대방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재기도 전에 밀려들어오는 감정이 있고 따라서 어떤 선택도 실수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
영원할 것 같던 밤이 지나 공항에 조명이 하나 둘 켜지고,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졌다. 셋 중 가장 먼저 탑승장으로 가야 하는 내가 배낭을 고쳐매며 농담 섞어 물었다. 그래서 난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글쎄, 그 어떤 누구라도 답을 못줄 것 같은데?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깨닫는 수밖에. 미리 알았으면 나부터 그러지 않았겠지. 너도 하고 싶은 대로 해. 이번에 유럽 배낭여행 가잖아? 재밌게 즐기고 와.”
철없는 질문에 돌아온 명쾌한 대답을 듣고 조금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