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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파니 Feb 15. 2024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 궁전 대신 낮잠을 선택하다

40일간의 배낭여행 일곱 번째 행선지

1.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가는 비행기는 새벽 보딩이었다. 시간을 맞추려면 최소 새벽 4시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에, 밤을 새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호스텔 펍크롤 행사는 그날 하필 라틴바에서 열렸고, 새벽까지 신나게 떼창을 하다가 3시가 되어서야 부랴부랴 모든 짐을 배낭에 쑤셔 넣은 채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싣었다. 마지막까지 강렬한 숙취를 선사해 준 이 도시는 여러모로 기억에 오래 남을 듯했다. 


그라나다까진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입구를 찾지 못해 뱅뱅 돌다 탈진할 때쯤 직접 마중 나온 할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에어비앤비는 아늑한 가정집이었고 대학에 진학해 마을을 떠난 큰아들의 방을 내가 쓰게 되었다. 떠듬떠듬 스페인어로 집이 너무 예뻐요 주절대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아주신 아부엘라는 말했다. 미 까사 에스 뚜 까사. 나의 집이 곧 너의 집이야.

그라나다에서 하루동안 내 공간이 되어준 고마운 방

사람별로 나라별로 해장을 하는 방식은 다양하다지만 나는 맵칼 뜨끈한 국물 대신 느끼하고 기름진 음식을 선호한다. 숙취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나에겐 스페인 남부 스타일 츄러스인 ‘뽀라스’가 제격이었다. 산더미같이 나온 두툼하고 쫄깃한 츄러스를 뜨거운 초코국물에 적셔 먹으니 속이 좀 잠잠해졌다. 느끼할 때쯤 오렌지를 직접 갈아 만든 오렌지 주스를 들이켜주면 천국이 따로 없다. 여기는 가로수도 오렌지나무 더니, 햇빛샤워를 받고 자란 오렌지 맛은 과연 그 자체로 상큼했다. 

남은 츄러스를 비닐봉지에 야무지에 싸서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했다. 


그때의 난 몰랐다. 엄청난 산보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유적지에 송도해상케이블카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까.. 그렇지만 전날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한 나는 저절전 모드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고 몇십 걸음에 한 번씩 벤치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떨궜다. 뙤약볕에 터벅터벅 성곽을 따라 걸어 다니다 결국 모든 풍경들이 거기서 거기로 보일 때쯤, 아직 폐장시간 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에어비앤비로 돌아가 낮잠을 자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 보면 혼자 여행을 떠난 이후로 한 번도 중간에 숙소에 들어가 쉰 적이 없었다. 쉬엄쉬엄 다니자고 마음먹었지만 내 안의 한국인 DNA가 지키고픈 마지막 자존심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숙취와 밤샘 앞에 장사 없다고, 나는 이국적인 모자이크도 짙푸른 녹음과 견고한 성벽을 뒤로하고 유럽으로 건너온 이래 가장 다디단 잠을 잘 수 있었다.

비록 중간에 후퇴했지만 참 아름다웠던 알함브라 궁전

2. 그라나다를 여행일정에 껴넣은 이유는 딱 두 가지였는데, 알함브라 궁전은 사실 대외적 명목이었고 진짜 이유는 그라나다 만의 타파스 문화 때문이었다. 식사 시 간단히 와인이나 샹그리아, 맥주를 곁들이는 식문화를 가지고 있는 스페인에는 메인 디시 이외에도 가벼운 안주 개념의 ‘타파스’라는 게 있는데, 보통 만원 이하의 저렴한 가격에 적은 양의 음식이 서빙된다. 타파스 자체는 스페인 전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이곳 그라나다가 유독 특별한 이유는 주류 한 잔 당 타파스 한 접시가 무료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인심 좋은 스페인 남부의 정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이 문화에 반해 그라나다행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시간을 오후 9시가 되기 20분 전이었다. 부랴부랴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시내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구글맵으로 대충 찾아본 식당으로 향했는데, 사실 어디를 가나 맛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향한 식당에선 띤또 데 베라노를 시켰다. 레드와인에 레몬소다를 탄 이 음료는 이번 스페인 여행 내내 내 최애 메뉴였다. 이상하게 난 샹그리아를 마시면 늘 머리가 아팠는데, 이 음료는 도수가 세지도 않고 샹그리아보다 훨씬 산뜻 달달 했다. 

곧이어 나온 타파스는바삭쫀득 패스츄리 안에 게살과 야채를 갈아넣은 네모난 고로케. 식당 맞은편 골목에서는 버스킹이 한창이었다. 거리가 흥겨운 주황빛으로 금세 물들었다. 맛과 분위기에 취해 한 잔 더 주문할까 망설이다가 여러 타파스 바를 가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혼자 여행의 또 다른 장점 중 하나는 비교적 식당 자리를 잡기 쉽다는 것. 놀이공원에서도 혼자온 사람들을 남는 자리에 끼워 넣어 먼저 탈 수 있게 해주는 ‘싱글라이더’ 제도가 있듯이, 식당에서도 테이블 대신 바 석에 먼저 앉게 해주기도 한다. 두 번째 타파스 바에서는 덕분에 제법 빨리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레몬맥주인 끌라라와 맛조개 요리를 시켰다. 맛조개가 먹어보고 싶어 가볍게 시켰는데 네모난 접시 위에 탑처럼 쌓아 올려진 맛조개에 압도된 것도 잠시, 스페인에서 먹은 해산물 요리 중 손에 꼽히게 맛있었던 탓에 금세 접시를 비웠다. 토마토도 고추장도 아닌 빨간 소스는 이상하게 내 입맛에 꼭 맞았다. 곧이어 서빙된 무료 타파스는 대구살을 그린페퍼 소스에 묻힌 찜요리. 행복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 진심으로 또 가고 싶다.

그라나다 여행기를 쓴다면서 궁전 이야기는 안 하고 음식예찬이나 잔뜩 늘어놨지만, 특별한 레시피나 강한 향신료 없이 오로지 신선한 원재료 본연의 맛으로 승부를 보는 그라나다의 타파스 바 호핑이 유독 즐거웠던 건 와인을 세잔 연거푸 마신 탓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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