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르담 Feb 02. 2020

글쓰기의 슬픔

나는 기뻐도 쓰고, 슬퍼도 쓸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뒤
많은 것이 변했다.


그 글들이 모여 책이 되었으며, 책은 생각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나에게 큰 위안이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니 참 좋다. 더불어, 글과는 연계가 없던 나도 글을 쓰니, 이제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하는 것도 나름의 뿌듯함이다. 그 밖에도 더 많은 것들을 글쓰기를 통해 얻고 있지만, 일장 나열해봤자 예측 가능한 수준이고 어찌 되었건 글을 써서 좋은 점이 많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니 더 이상 이어나가지 않아도 되겠단 생각이다.


문제는, 이 세상 모든 일들엔 명과 암이 있다는 것이다.

밝기만 한, 기쁘기만 한 일은 없으며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들뜬 마음 저변에는 무거운 마음도 존재한다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고 책이 되고, 강연을 하고 생각을 나누는 일들 뒤에는 수많은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림자는 검은색으로 그 농도를 측정할 순 없지만, 흐린 날의 그림자와 햇빛 쨍쨍한 날의 그림자는 확연히 구분된다. 맑고 밝은 날의 그림자가 더 어둡다는 건 누구라도 아는데, 날씨 좋은 날 우리는 그림자의 어두움을, 아니 그 존재 자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글쓰기,
그 슬픔에 대하여


그래서일까.

마냥 행복하던 그 길엔 가끔 찬물이 끼얹어진다. 나의 선의와 의도는 온데간데없고, 누군가의 재단에 내 글과 의미는 난도질당하여 이리저리 흩어진다. 그 흩어진 조각들은 갖가지 오해와 억측을 낳고, 누군가는 그 조각을 내 목에 들이댄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 그러하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 조각을 들고 주섬주섬 다가오는 그 손들이 어디서 본듯한 것들이라 마음은 영 어둡고 텁텁하다.


돌이켜보니, 그러한 슬픔은 다음과 같을 때 온다는 걸 느낀다.


첫째, 나의 글과 의도는 상대방의 해석을 뛰어넘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그것을 추하고 하찮은 것으로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글은 이미 내 머리와 손을 통해 떠나 나갔으니, 그것을 읽고 받아들이고 떠올리는 것은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물론, 더 무서운 건 읽어보지도 않고 그것을 결정 내버리는 사람들이다. 내 글의 조각만을 챙겨 날카로운 부분으로 나를 겨눈다. 그 조각에 내 바람과 의도, 의미가 다 담길 리 없다. 그것은 글이 아니다. 몇 단어의 조합이며, 완전치 않은 문장의 미완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 조각을 든 사람에게는 해석인 것이다. 

그러니 그 해석으로 네 의도는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변명보다는 침묵을 택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 더 말해봤자, 조각을 가지고 전체를 논할 순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가장 슬기로운 대응이지만, 조각조각이 모여 그 의미가 완성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형벌의 시간과도 같은 고통과 인내가 뒤따른다.

나는 내 글을 산산조각 내어 들이미는 사람들을 욕하지 않는다. 다만, 적어도 읽어 보고 그 의도를 이해하려 한 번이라도 노력해봤으면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아니, 그보다는 언젠가 내 글의 의미를 깨닫고 알아줄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는 걸 확신하며 나아가려 한다. 그게 내 침묵의 이유다.


둘째, 글은 기록으로 남아 언제나 펄떡거린다.


내가 잘 아는, 아주 유명한 소설가 한 분이 계시다.

그분의 글은 범접할 수가 없는데, 간혹 책이 출판되면 그 글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그 책은 금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다. 참으로 대단한 영향력이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언제나 마음의 상처 하나가 있다. 바로 젊은 시절 쓴 글이다. 당시 군부독재 정권 시절에 쓴 글 하나. 강압에 의해, 더 큰 소신을 지키기 위해 잠시 접었던 소신으로 쓴 글. 그것은 비수와 같이 그분의 가슴에서 펄떡거리고 있다.

글은 기록으로 남아 펄떡거린다.

'기록'은 요긴하지만 동시에 무서운 것이다. '기록'은 기억과 정서를 지배한다. '기록'은 그때의 상황과 의도, 신념,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록'은 읽고 해석하는 자의 것이다. 그러니, 강압에 의해 쓰였다고 한들, 원한다면 상대방을 가학 할 수 있는 불쏘시개로 사용이 충분하다. 

내 글도 마찬가지다.

기록으로 남아 펄떡 거리는 그것이, 언제 나에게 비수가 되어 날아들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내가 적어 놓고 행하지 못한 것들이나, 의도치 않게 왜곡된 것들이 나에게 다가와 펄떡일 때. 나는 그것을 해명할 수도, 해서도 안된다. 펄떡여 살아 있는 것을 부인하거나, 그에 대해 변명한다는 것은 그 당시 내가 쓴 글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다. 그러니 난, 내가 쓰는 글은 영원히 살아 펄떡인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글을 쓸 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무엇이나 표현하고 쓸 수 있다는 글쓰기의 초심을 조금은 바꿔야 하는 순간. 글쓰기가 슬퍼지는 순간이다.


셋째, 글은 결국 내 머릿속을 꺼내 보여주는 것과 같다.


사람은 옷 어느 한 부위가 벗겨지면 수치심을 느낀다.

재밌는 건, 그 수치심은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서 바지를 벗다가 안에 있는 수영복이 드러나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 바지를 벗다가 속옷을 보이면 상황이 이상해진다. 마찬가지로, 바닷가에서 비키니 차림은 야한 게 아니지만, 만약 전철 한복판에서 비키니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글을 쓴다는 건,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 것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글은 내 머릿속과 마음을 관통해 나오는, 속살보다 더 안쪽에서 나오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때로 그것은 설익었고, 또 때론 아직 준비되지 않은 몸꽝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한다. 마음이야, 언제나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항상 떠오른 영감을 멋들어지게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괴감이나 역량의 한계점은 글쓰기를 힘들게 한다.

본의 아니게 벗겨진 옷 안에 식스팩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준비한다고, 잘 쓴다고 쓴 글들도 식스팩은커녕 지방덩어리 가득한 살들과 같으니, 글 하나를 쓸 때마다 사실은 수많은 군중 속을 속옷 하나만 걸치고 다니는 느낌이다. 게다가 지인 중 몇몇이 내 글을 봤다고 하면 나는 화들짝 한다. 바로 옆에서 보는 나와, 글 속의 나는 확연히 달라 보일 수 있을 것이니까. 예를 들어, 직장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각자의 페르소나를 쓰고 만나지만, 나는 글을 쓸 때 페르소나를 덜 쓰거나 벗고 쓴다. 그 민낯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는 어쩌면 적에게 나 스스로를 노출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어떤 이들은 다들 글을 안 쓰는데 너는 왜 쓰냐고 공격 아닌 공격을 하기도 한다. 내 머릿속을 꺼내 보여준 대가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할 순 없는 일이고, 나 또한 모든 사람들을 좋아할 순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읊조려야 하는 이유다.




글쓰기는 결국 나의 이야기다.

상상을 하더라도, 그 상상은 나로부터 시작되며 내 주위 어떤 것들, 누군가와는 맞닿아 있다. 그러니 내가 쓰는 모든 글들은 누군가의 해석에 따라 판단되기도 하고, 살아 펄떡이는 그것을 내 목전에 들이대기도 할 것이며, 생생하게 드러낸 내 머릿속 이야기를 가지고 쑤군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합하여, 나는 글쓰기의 슬픔이라 한다.


그렇다면, 슬픈 일은 멈추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글쓰기에는 슬픔뿐 아니라 기쁨도 있다. 그리고 그중 어떤 것이 더 큰지를 가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기뻐도 쓰고, 슬퍼도 쓸 것이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은 양면과 같고, 양면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화상이다. 어느 한쪽을 부정하거나, 또 어느 한쪽이 두려워 나아가지 못한다면 인생은 반쪽이 된다. 반쪽짜리 인생은 내가 아니다. 사람은 완벽해지거나 완전해질 순 없지만, 그 양면을 오가며 조금은 더 완전에 가까워지는 존재란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불꽃같이 제 영혼을 토해 낸 반 고흐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나는 계속 쓸 것을 오늘도 다짐한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갑자기 나태해지고, 잘 참았다가 조급해지고 희망에 부풀었다가 절망에 빠지는 일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래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수채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그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테오에게 -




'직장내공'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며 일하기!)

'오늘도 출근을 해냅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나!)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이 땅의 모든 젊음에게!)

'진짜 네덜란드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의 매력!)

매거진의 이전글 2019년의 글 167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