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은 나에게서 온다.
길을 걷는다.
앞사람의 속도가 어째 영 어정쩡하다. 앞서 가자니 내가 왜 걸음을 더 재촉해야 하겠는지 모르겠고, 그대로 가자니 앞에 있는 사람과 나 둘 다 영 편치가 않다.
애매한 이 순간은 빨리 벗어나고픈 곤욕이다.
그러다 문득 관점은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변질된다.
이 사람은 왜 하필이면 내 앞에 있는가. 이 사람은 이 좁은 길에서 이렇게 천천히 걷는가. 이 사람은 나를 괴롭히려 일부러 이러는 것인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
더불어, 나에 대한 자조도 들려온다.
나는 왜 이 길로 접어들었는가. 왜 내 삶은 항상 이런 식인가. 그냥 술술 흘러가면 안 되는 게 인생인가. 왜 내 삶에는 이런 장애물이 항상 넘쳐 나는가. 삶에 방해가 되는 이런 사람들은 왜 내 주위에서 득실대는가.
나는 머리 위에 인형 뽑는 기계의 집게가 있다고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집게가 나를 잡아 위로 끌어올린다.
위에서 바라본 그 길엔 그저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누가 누구를 해하려 하거나, 누가 누군가의 길을 막으려 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그저 걷는 속도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앞사람을 탓하거나 내 삶을 자조하는 건 쓸데없는 비약인 것이다.
이러한 일에 대해, 사사건건 누군가를 탓하거나 내 인생을 폄하하는 건 스스로에게 주는 형벌이다. 우리는 살다 보면 이와 유사한 일들을 무수히 겪을 것이니 끝나지 않을 형벌은 우리를 무기징역수로 만든다.
세상은 타인과의 교류로 굴러간다.
사회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니,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교류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더 가장 작은 교류의 단위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타인과 나는 다르다.
걷는 속도도 다르고, 생각하는 법도 다르며, 같은 사물을 보고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관점은 제각각이다. 나 또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
갈등은 거기에서 온다.
나와 같지 않은 건 모든 게 갈등의 요소다.
그러니 갈등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삶을 앙망하느라고 사람들은 천국을 바라는 것 아닐까. 모든 갈등의 요소를 빼면 천국이 되고, 모든 갈등의 요소를 집어넣으면 지옥이 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갈등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우리 삶의 진실이다.
갈등을 만드느냐 그렇지 않느냐, 갈등을 키우느냐 잠재우느냐. 그것은 많은 부분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즉, 앞서 나와 걸음의 속도가 다른 사람을 마주 했을 때 내 첫 마음은 갈등을 '만들고', '증폭' 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갈등은 나에게서 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지만, 결국 흔들리는 건 나 자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