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어떤 직업을 가질 거냐고 묻는 이 삭막함을 어릴 땐 알지 못했다.
그저 어른들의 물음이었으니, 답을 잘 내어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장래희망'이라는 학교에서 나눠준 거무튀튀한 종이의 한쪽에 쓰인 그 질문에, 나는 틀린 답을 내어 놓진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렇다면, 나는 커서 뭐가 된 걸까.
'장래', 그러니까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한 희망을 하나하나 쌓아온 그 결과가 지금의 나일까. 아니면 '어른'이란 말로 그 질문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답을 해버리고 말까. 어릴 때 장래희망으로 적어냈던 대통령, 의사, 과학자, 선생님, 훌륭한 사람 등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지금의 나를 보니, 스스로가 과거의 내 희망을 빼앗아버린 건 아닐까 화들짝 한다.
그래, 지나간 건 잊기로 한다.
이제 와서 지금의 나를 들추어 무엇이 남을까.
그 순간,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 내 '장래희망'은 무엇일까?
아, 어렸을 때 받은 질문보다 훨씬 더 고난도의 질문이다.
그 질문 이전에, 중년에게도 과연 '장래희망'이 있을까? 아니, '장래'가 있을까? 사전적 의미는 다가올 날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보통 '장래'라는 단어의 명도를 매우 밝게 규정한다. 즉, '장래'는 '미래'를 말하고, '미래'가 있다는 말은 젊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래희망'까지 내어 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정말 다행인 것은 글을 쓰고 나서는 삶의 방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선한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
그러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내며 강연을 한다. 내 지식과 경험을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더불어, 한 사람이라도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쓰기 강의를 실천한다.
중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장래희망'에 대한 대답으로 '직업'을 내어 놓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도 희망하는 게 많다.
그리고 다가올 날들은 말 그대로 '장래'다. '장래희망'도 좋지만, '희망장래'란 말도 꽤 괜찮게 들린다. 어차피 앞날은 나에게 오게 되어 있고, 내가 희망하는 것을 실천하며 살면 그것으로 나의 미래는 밝은 게 아닐까.
중년이 뭐 어떻다고 장래희망이 있을까란 질문을 했을까.
참으로 우문이다 우문. 나보다 하루라도 빨리 태어난 사람들은 나에게 한창 때라 부럽다고 말할 것을.
내가 지금 무엇이 되었는지 굳이 규정하지 말고, 앞으로 어떠한 희망을 안고 살아갈 지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래야 삶이 흐른다.
흐르는 것엔 치유 능력이 있다.
그렇게, 내 삶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내 삶내 삶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