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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09. 2020

내 삶의 챕터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것조차 나의 해석이라 해두고 싶다.

삶이 소설 같을 때가 있다.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또 때론 시리도록 사실적이다.


내 삶은 누군가의 상상일까.

누군가 운명이라는 만년필을 들어 내 삶을 이리저리 써 대고 있는 걸까. 내 삶의 주인은 나라고 주장하곤 하지만 그 안엔 떳떳함이 없다. 왜 태어났고, 누가 나를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존재의 항변은 설득력이 덜하다.


그래.

누군가 내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내 삶의 제목은 무엇일까. 내 삶의 정확한 장르는 무엇일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나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나는 저자를 모른다.

이건 매우 불공정한 게임이다. 저자는 나를 샅샅이, 속속들이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다음의 행동을 이미 머릿속에 그려 놓고, 나에게 닥칠 에피소드와 시놉시스를 이미 정해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억울 한 건, 일어 나는 모든 일은 나의 몫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펜대만 굴릴 뿐, 내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가 그려 놓은, 정해 놓은 이야기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챕터를 떠올린다.

지나온 나의 이야기들을 어느 기준으로 나누어보면 삶의 챕터가 보인다. 그것은 나이로도 나뉘고, 사건으로도 나뉜다. 그런데, 가장 의미 있는 챕터의 구분은 아무래도 통찰과 깨달음의 어느 순간이다. 나이로 어느 시점을 나누는 것은 연대기일 뿐이다. 내 삶의 이야기나 장르가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연도만 쭉 적어 놓은 책은 아니란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추리가 된다.

지나온 챕터들을 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 걸어가는 길 그리고 걸어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이다. 저자가 나에게 힌트를 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어렴풋이 알아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저자는 독자의 해석을 뛰어넘지 못한다. 아무리 저자가 A라는 의도로 글을 썼어도, 독자가 B라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B인 것이다. 자, 이제 어느 정도 불공정함에 대한 불쾌함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내 삶이라는 책을 가만 읽어보자고 마음먹는다.

각 챕터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형태는 어떠한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석해보는 것이다.


내 삶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는 상관없다.

나는 그것을 해석하는데 몰두하려 한다.


이것조차 저자가 나에게 바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조차 나의 해석이라 해두고 싶다.


이것이 내가 저자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항거이자, 나에게도 바람직한 최선의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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