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을 놓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주식회사 안테(Ante)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많이 힘들어 보이시네요.
얼마나 되셨죠?
아, 그리 오래되진 않았네요.
맞아요, 그래서 더 힘들 수도 있어요.
여기가 어딘지는 이미 잘 알고 오셨죠?
네, 그렇습니다. 바로 인연을 지우는 곳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이 운영하는 라쿠나(Lacuna)하고는 좀 다릅니다.
비교도 하지 마세요.
라쿠나는 단지 기억을 지우는 곳입니다.
그것도 이별한 당사자 두 명의 기억을 모두 지워야 하죠.
참 번거롭습니다. 그거.
만약 한 명만 지우고, 다른 한 명은 그 기억을 지우지 않는다면 어떻겠어요?
게다가 얼마 전엔 부작용도 발생했습니다.
기억을 지운 두 남녀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네요?
즉, 기억을 지워도 사랑이 다시 시작된 거죠.
그 얼마나 안타까운 가요?
돈 버리고, 다시 만나고.
또 서로를 헐뜯고, 자기주장만 펼치며 싸울 것을.
우리가 획기적인 것은요.
기억이 아닌 인연을 지우기 때문입니다.
상상이나 해보셨어요?
그러니 당신은 큰돈을 주고서라도 여기 있는 겁니다.
잘 들어보세요.
기억만 지워서 뭐합니까?
우리 안테사의 시스템은 기억과 최면을 기반으로 한 타임머신 치료입니다.
여기 보이는 이 기계는 말이에요.
아, 겁먹지 마세요.
좀 무지막지하게 생겼지만, 몸을 아프게 하거나 머리게 구멍을 뚫진 않습니다.
여기 편안히 누워 계시면, 제가 최면 유도를 할 거고요.
그리고 최면이 제대로 걸리면 타임머신이 작동됩니다.
최면을 하는 동안 당신의 기억과 추억은 고스란히 여기 모니터에 보이게 되고요.
저는 그 모니터의 영상을 보며 작업을 하는 거죠.
이 타임머신은 당신과 당신의 인연이었던 사람의 시간만 바꿀 수 있습니다.
즉, 둘의 인연이 사라지는 거죠.
최면 속에서 당신은 이별한 그 순간부터 역순으로 기억 여행을 갈 겁니다.
그리고 처음 손을 잡았던 그 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손을 처음 잡는 그 순간.
당신은 결정해야 합니다.
손을 그대로 잡을 것인지.
아니면 손을 잡지 않을 것인지.
손을 잡으면, 사랑했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 갑니다.
하지만 기대는 마세요. 어차피 헤어지게 됩니다.
괜히 달콤함을 한 번 더 느끼고 싶어서 그러진 마세요.
저는 추천 안 합니다. 나중에 몇 배로 더 아프거든요.
다시, 손 잡는 그 순간에 정신을 차린다면.
그래서 손을 잡지 않게 된다면.
삶의 전부였던 두 명의 사랑과 추억, 그리고 인연이.
아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여기에 누워 보세요.
마취도 필요 없습니다.
저의 능력과, 이 기계의 시스템을 믿으세요.
모니터에 출력될 당신의 영상을 위해, 이 머리띠만 하시면 됩니다.
어때요, 아프지 않죠? 괜찮죠?
자, 눈을 편안히 감으세요.
그렇다고 잠들지는 마세요. 잠들면 안 됩니다.
자, 안테 안테 안테 안테 안테.
당신은 당신의 기억 속으로 빠져 듭니다.
안테 안테 안테 안테 안테.
당신은 이별의 그 순간에 있습니다.
당신이 보입니다.
아, 당신의 남자도 보입니다.
저런, 당신은 몹시 화가 나 있군요.
남자는 어쩔 줄 몰라합니다.
허허, 당신은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했군요.
가엾어라.
순간 달콤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죠.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 거죠?
사랑해선 안될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시작하고.
단꿈에 젖어 보이지 않던 현실이, 갑자기 허탈하고 무섭게 찾아왔을 겁니다.
당신은 주먹질까지 하고 있군요.
아, 그 남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분노군요.
자, 이젠 서로 가장 사랑했던 때로 가봅니다.
역시, 서로 죽고 못 사는군요.
당신의 얼굴이 최고로 행복해 보입니다.
얼굴에 꽃이 피었어요.
그는 매우 자상하군요.
당신은 그 매력에 빠진 거고.
와, 매너 끝내 주네요.
당신이 넘어갈만해요.
와우, 이런 둘의 잠자리가 화끈하군요.
아, 당신은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어요.
그 남자는 아래에.
당신은 위에.
애마부인이 따로 없군요.
당신은 정말 잘 달리고 있어요.
가식적이지 않은 저 오르가슴이 눈에도 보이네요.
당신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네요.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워요.
사랑해선 안될 사람들의 사랑이라 쳐도, 이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서로의 눈빛이 타오릅니다.
서로의 정열이, 욕구가, 욕심이, 마음이, 육체가 타오르고 또 타오르네요.
방에 커튼이 쳐져 있어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온전히 대체 몇 시간을 서로에게 탐닉하는 겁니까?
부럽습니다.
부러워.
자, 이젠 풋풋했던 연애 초기 시간으로 가봅시다.
정원을 거닐고 있네요.
길을 걷다 키스를 하고.
사진을 찍어주고.
어느 한 벤치 위에 등을 마주대고 앉아 있네요.
서로의 귀 한쪽엔 이어폰이 걸쳐져 있고요.
흘러나오는 음악이 뭔지 모르겠지만.
낭만적입니다. 아름다워요.
햇살이 찬란하네요.
둘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네요.
자, 이제 좀 더 전으로 돌아갑니다.
당신과 그 사람의 시작점.
누가 먼저 손을 잡았던 가요?
분위기를 보니 남자가 손을 잡을 것 같습니다.
차가 끊긴 새벽 같네요.
둘은 말없이 걷고 있어요.
바람이 찹니다.
날씨가 스산해요.
남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당신과 그 남자의 손이 스치는 빈도가 높아집니다.
아아... 잡을 겁니까, 잡힐 겁니까?
정신 차리세요! 정신!
이제 당신의 결정만이 남았습니다.
자, 자.... 어쩔 겁니까!!!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어시스턴트. 이리 와서 받아 적게.
사망시간 10시 20분 55초.
아름답지만 가여운 XXX 씨.
당신은 '안락사' 되셨습니다.
“안테사 직원과의 인터뷰”
말도 마세요.
요즘 정말 일이 넘쳐 납니다.
불과 50년 전인 2천 년대 중반만 해도, 안락사에 대한 찬반이 거셌어요.
죽음은 개인의 권리냐, 아니냐.
요즘은 뭐 죽음이 넘쳐나죠.
그저 뭐, 여행을 갈까 말까 정도의 선택 수준이라고나 할까?
요즘은 다들 잘 살게 되어서 사실 죽을 이유가 별로 없어요.
먹고 사는데도 문제없고, 취업이나 돈 문제도 없잖아요.
죽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죽는 사람이 바보가 된 시대인 거죠.
자기만 손해니까.
모든 것이 보장되는 이 세상을 왜 안 삽니까?
근데 결국 그놈의 사랑 때문에, 이별 때문에 선택하더라고요.
마음 아파하느니, 추억하느니 사라지겠다는 거죠.
참 요즘은 멘탈들이 다 유리 같아요.
글쎄 지난주엔, 고백했다 차였다고 여기에 온 학생도 있었어요.
추억 여행을 하고, 결국엔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들 왜 그러나 몰라요.
글쎄, 전 설사 그러한 일이 있더라도 꿋꿋하게 살 겁니다.
다른 사람 찾아가면 되지 뭐 그리 한 사람에게 매달린 답니까?
사랑에 죽고 못 사는 저런 사람들 저거.
차라리 사랑타령 안 하고 즐기며 사는 제가 더 낫지 않습니까?
그렇죠?
제가 맞는 거죠?
그런데, 솔직히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요.
모니터 속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나는 언제나 경험할 수 있을까... 하고요.
이런, 시간이 다 되었네요.
벌써 손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손님.
어라? 혹시 당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