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도 있다.
이런 젠장.
지각이다.
헐레벌떡 시작하는 하루는 아주 지겹다 못해 친근하다.
늦었으니 택시를 탈까, 전철을 탈까 망설이다 어차피 늦은 거 돈이라도 아끼자는 심산에 전철을 타기로 했다.
직장인에게 머피의 법칙은 항상 따라온다.
아마 머피의 법칙은 직장인을 위한 전용 이론일지도 모른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라도 잠깐 볼라치면 어김없이 상사가 다가오고, 바쁜 일은 한꺼번에 몰리며, 오타는 항상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이메일에서 발견된다. 오늘과 같이 지각한 날은 잘 오던 전철도 펑크가 났는지 늦게 오고, 나보다 늦게 출근하던 팀장도 일찍 나와 있곤 한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래서 전철을 택했다.
뛰지 않았다.
천천히, 어차피 욕먹을 거 그리 아등바등하진 말자고 스스로 중얼거리며 전철역에 닿았다.
서두르지 않고 계단을 올라간 나는 조금 당황했다.
마치 내 전용 기사가 차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는 듯이, 그 바쁜 아침에 그리고 내가 늦은 그 순간에 방금 도착한 전철이 문을 활짝 열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 순간 만큼은 로또 1등이 부럽지 않았다.
조심스레 전철에 올라타고 문이 닫히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와, 뭐 이런 날도 있네?
전철에서 내린 후 다음의 걱정거리는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공식적인 출근 시간인 9시 몇 분 전은 지각이냐 아니냐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아마도 생활 패턴이 비슷한가 보다.
재밌는 건, 같은 입주사나 사무실 사람이 아니라도 보던 얼굴들이 매일 아침 보인다는 거다.
즉, 늦는 사람은 계속 늦는다는 거다.
뭐, 내 얼굴도 많이 팔려 있을 거다.
그렇게 동족애를 보일 것 같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표정이 무뚝뚝하고 엘리베이터를 향한 경쟁과 몸부림은 양보가 없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빌딩 현관을 들어갔을 때 내가 예상한 긴 줄은 없고 몇 명만 있을 뿐이었다.
내가 줄을 서자마자 바로 수 십 명의 사람들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기분이 좋았다.
놀이 공원의 인기 있는 놀이기구 앞 긴 줄 앞에 서서 뒤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삼는 그런 기분.
그러니 정말 좋을 수밖에.
오늘 뭐가 좀 잘 풀리네?
뭘 해도 되겠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책상 앞에 도착한 시간은 9시 5분.
공식 출근 시간은 9시지만 팀장은 8시, 나머지는 8시 30분 경에 도착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 그런데 오늘은...
내가 두 번째로 도착했다.
업무를 위해 노트북을 펴고 있는데 팀장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세상에. 팀장이 지각이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 그리고 무안한 얼굴로 나를 보며 미안하다고 한다. 늦어서.
야.... 이거 오늘 정말 재미있는 날이네?
그래.
오늘은 뭔가 돼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잠깐 머리 좀 식히다가도 업무를 위해 파일을 열면 어김없이 팀장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자신이 원하던 자료라며 이렇게 알아서 챙기고 있다니 든든하다며 나를 추켜 세운다.
내가 포털사이트를 열면, 마치 자동차 깜빡이를 켰을 때 무섭게 달려오는 뒤차처럼 더 무섭게 달려오던 존재였는데...
그저 웃었다.
오늘은 모든 걸 즐기기로 했다.
그래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살았으면.
그리고 회사생활 정말 인간답지 못한 대우받은 적도 있었으니.
이런 날도 있어야지.
참 웃기다.
이런 사소한 걸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니.
사람은 소박하다.
아니, 내가 정말 소박하다.
오늘 저녁은 왠지 데이트가 하고싶은 날.
옆 부서에 있는 동기 직원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밥이나 한 번 먹자고 할 요량이었다.
근데 오늘의 정황을 보아하니, 승리의 여신은 나에게 있음이 확실히 느껴졌다.
그렇다면 큐피드도 나의 편일 터.
나는 당장 그녀에게 다가가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고 했다. 하얀 블라우스, 골반에 타이트하게 자리 잡은 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검은 스타킹의 실루엣이 나를 아찔하게 했다.
물론, 처음엔 그녀의 눈을 보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웃음은 참 예쁘다. 그냥 예쁘다란 말이 그냥, 그냥 막 어울렸다.
내게 콩깍지가 끼지 않았다는 것은, 이 친구를 향한 많은 남자들의 구애가 있다는 것이 증명한다.
아니면, 많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콩깍지가 끼었거나.
역시, 큐피드도 내편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녀가 바로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난 오늘과 같은 날이 매일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
아는 형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내가 좋아하는 그녀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니 차 좀 빌려 달라고.
그 형은 마침 전화 잘 했다고 한다.
내일부터 해외 출장을 가니 차는 다음 주까지 맘껏 쓰라고.
수입차에 선팅도 빵빵하게 되어있으니 데이트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차 내부는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누가 봐도 고급 세단.
왠지 오늘의 진도는 매우 빨리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퇴근 시간 한 시간 전.
팀장에게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겠다고 했다.
다행히 오늘 부서에 급하게 떨어진 일이 없고, 팀장도 오전에 지각한 것이 미안했는지 흔쾌히 허락한다. 그것도 웃음을 띄우면서까지.
오늘은 세상이 내편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 그리 자신 있게 요청한 것이다. 이제, 아는 형의 차를 가지고 그녀를 데리러 사무실 앞으로 올 것이다.
그녀도 일찍 퇴근하여 5분이나 일찍 내려와 있었다.
내려서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난 다시 운전석으로 앉았다.
그녀가 내심 좋아하는 눈치다.
오늘은 맛있는 소고기를 먹으러 갈 것이다.
그곳 소고기는 맛이 끝내줘서 이건 내 필살기 중 하나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이성과의 데이트 중 서로의 호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육식을 하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나서 이기도 했다.
아무렴 어떠랴.
오늘은 세상이 내편인데.
오늘 운수는 정말 눈부시게 좋았다.
마침내 도착한 고깃집.
먼저 내려 그녀가 자리한 곳의 문을 열어 주었.......
퍽! 퍽! 퍽!
어라? 이건 뭐지?
나 지금 무언가로 머리를 심하게 맞고 있는 거 아닌가?
내 머리에서 튀는 피가 땅바닥에 흥건했다.
그녀는 놀라 어디론가 사라졌고, 영문도 모르는 나는 얼굴을 땅에 박고 쓰러졌다.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눈동자만 굴릴 수 있었고, 심장박동이 빠르게 그러나 곧 느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나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조폭이다.
어제는 큰 형님의 심부름으로 사람 한 명을 담그고 운전하며 돌아오는 길에 시비가 붙었다.
썬팅이 진한 수입차가 내 뒤에서 상향등을 마구 쏘아댔다.
사람 한 명 담그고 이제 곧 학교(감옥)로 들어가야 하는 내게 깜빡이는 문제가 아니었고, 그놈은 성가신 존재였다. 상판 떼기 좀 볼라 해도, 그놈의 썬팅이 어찌나 진하던지.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의 시비라 기분이 몇 배는 더 더러웠다.
너, 잘 걸렸다. 어차피 오늘 한 명 담그고 학교 가야 하는 거.
너 하나 더 담근다고 내 인생 달라질 것 없다.
나는 그 차를 따라갔다.
마포 어느 고층 빌딩 앞에 주차한 그 차로 다가가 전화번호를 적어왔다.
지금 당장은 담글 수가 없었다.
큰 형님께 오늘 결과를 보고해야 했고, 또 앞으로 몇 년 있다 나오면 나에게 무엇을 해주실 건지에 대해 네고를 해야 하는 날이기 때문에.
고맙게 생각해라.
덕분에 네가 하루 더 살 수 있는 거다.
오늘 그놈 집 앞으로 찾아갔다.
전화번호 하나만 있으면 이런 정보를 얻어 내는 건 일도 아니다.
뒤를 밟았다.
어느 한 회사 빌딩 앞에서 여자를 태운다.
여자의 몸매가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좀 더 감상할 텐데, 오늘은 그럴 겨를도 없다.
어제 당한 시비로 인해 분노가 차오르기 때문이다.
마침내 녀석이 차를 세운다.
왕십리 한 골목의 유명한 소고기집에 주차를 한다.
재빨리 주차를 하고 난 연장을 챙겼다.
저런 보통 사람은 쇠파이프로도 충분하다.
운전석에서 내려서 여자 쪽 문을 열어주려는 그 녀석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사방팔방으로 피가 튀었다.
어차피 학교 갈 몸.
몇 년 더 살다 오지 뭐.
어제 네가 쏘아댄 상향 등에 대한 복수다!!!
나를 만난 건 네 팔자다.
오늘은 너에게 참 운수도 없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