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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18. 2016

[쪽 소설] 늙지 않는 남자의 사랑

늙지 않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해서 늙지 않는 부류의 사람

난 늙지 않는다.

내가 늙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20대 중반의 어느 때다.


아니, 내가 늙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기 보단 다른 사람들이 늙어 간다는 것을 먼저 알았다.

그리고는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그대로라는 것을.



나에게 일어난 이러한 일들이 도통 무슨 영문인지 몰랐을 때, 난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다.

바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20대 중반의 그 나이로 돌아가고 더불어 늙지 않는다는 것.


왜인지는 모른다. 늙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게는 사랑에 빠져서 늙지 않게 되었다.

이 사랑이란 것은 항상 새로워서 내 맘을 설레게 하고, 나를 젊게 했다.


이별의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했다.

난 어차피 늙지 않으므로, 늙어가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이별을 맞이하는데 익숙해졌다.


재밌는 것은, 내가 이별을 고하는 횟수보다 이별을 당하는 횟수가 더 많다는 것이다.

대개는 여자들이 자신의 모습이 늙어가며 스스로를 못 참아했다.


주위 사람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여자가 더 늙어 보인다거나, 이모나 누나와 함께 온 것이냐는 소리를 들으면 그 다음날은 어김없이 이별통보가 날아왔다.

어떤 여자는 나에게 저주가 걸린 게 아니냐며 욕을 하고 차갑게 돌아섰다.

생각해보니 저주라면 저주랄까?


하지만 저주라는 맥락에서 보면, 참 괜찮은 종류 중 하나라고 본다.

누구나 젊어지고 싶은 욕망이 있고, 누구나 사랑하고픈 갈망이 있는데, 나는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으니까.



내 신분 세탁은 전문 브로커에게 맡긴다.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여럿 알고 있고, 그들의 신분 세탁도 함께 한다.


대개는 사망 신고를 내고 숨었다가 다른 사람의 신분과 바꿔치기하는 수법이 쓰인다.

때로는 우리 부류의 사람들끼리 신분을 맞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일어나는 해프닝은 언제 어디서나 있다.

그래서 최대한 신분이 바뀔 때마다 스타일을 달리하곤 한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나와 같은 사람, 나와 같은 '저주?'에 걸린 사람끼리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경우 그 축복과 같은 저주는 멈춰지고 하루에 10년씩 늙게 되어 열흘을 넘긴 사람들이 없다.


문제는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나와 같은 부류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철저히 신분을 숨기게 되니, 신분을 맞바꾼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아, 또 하나. 늙지 않고 사는 기간이 10년이 지나고 나면, 이별 후 1년 안에 반드시 또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정확히 1년이 지난 그 시점부터 하루 10년의 노화는 어김없이 찾아오게 된다.


대체 누가 이런 법칙을 만들고, 또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물어봤으나 그들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삶이 지겨운 사람들은 때론, 서로 의도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세상과 이별을 고하곤 한다.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방법도 흥미롭다.


사실, 사랑이란 게 일부러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걸 누구나 잘 안다.

머리만으로 가능한 것이 사랑이라면,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이 '일부러?' 사랑에 빠지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인상에 물론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거나 최소한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서로에 대해 터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 산책을 한 후, 석양 아래에서 4분간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본다.

이 패턴을 일주일 내내 반복한다.

난 이렇게 해서 사랑에 빠지는 커플을 열에 아홉은 봐왔다.


정말 사랑에 빠질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열흘 내에  한 줌의  재가되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보통의 사람보다 연애는 확실히 많이 하는 것 같다.

결혼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끝이 어떻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결혼은 절대 금물이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연애를 하게 되면 노화는 막을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연애를 해야만 한다.


사랑에 빠지는 기준이 무언가 하는 것은 참으로 주관적인 거라 어떻게 정의할 수 없다.

때론, 내가 사랑에 빠진 건지 아닌지를, 젊어지는 현상을 보며 깨닫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을 정해 놓는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기쁨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면서 눈물을 흘린단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격한 감정 때문에, 길거리나 식당 또는 혼자 멍하게 있을 때에 부지불식간 찾아와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 또한 당황시킬 정도로. 우는 이유는 사랑에 빠진 기쁨도 있지만, 자신보다 사랑하게 될 다른 존재가 생겼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 한다. 복합적인 감정이다. 역시 사랑은.


사실, 난 늙어도 또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사랑할 만큼 해봤고, 즐길 만큼 즐겨봤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찾아왔다.

그리고 나 또한 사랑을 언제나 찾아다녔다.


언젠가 이 세상 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면, 난 앞서 말한 사람들과 같이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다가가 의도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세상과 이별을 고할 준비가 언제나 되어있다.


아직은 실천할 엄두가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못할 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늙어본 적이 없어서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잘 모르겠다.

물론, 힘없고 늙고 병들어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직은 저렇게 되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참고로, 난 늙지 않을 뿐이지 건강은 챙겨야 한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치곤 모양 빠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내 건강은 내가 챙겨야 한다.


그래서 난 술과 담배를 절대 하지 않는다.

만약을 위해서라도 몸에 좋지 않다고 하는 것들은 절대 멀리한다.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 중에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알게 되었다.

원인 모를 불치병은 그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그는 외롭게 홀로 남아 급격히 노화되어 죽었다.

사람들은 희한한 병에 걸려 죽었다고 수군댔다.



난 돈이 좀 많다.

오래 살다 보니 쌓인 노하우다.


돈을 어떻게 모아야 하는지, 어디에 투자하면 될지를 가늠할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만약 요즘에 태어났으면 돈이 없어 사랑도 못할 뻔했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요즘 태어나는 내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도 못한 채 죽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으니 사랑을 시작조차 못하게 되는 경우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사랑은 사치처럼 보인다.

사랑할 시간이 없다. 맘의 여유도 없고. 돈도 없다.


사랑하는데 돈이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당신에게, 난 자신 있게 당신은 가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돈이야 어느 정도만 있으면 돼지...라고 말하는 당신의 수저 계급이 의심스럽다. 흙수저는 아닐 것이다.


굶어 죽어 가는 사람을 보며, 아니 돈이 없으면 라면이나 빵이라도 먹지...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그것마저 살 돈이 없는 사람들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내가 돈이 많아서 사랑을 조금은 더 쉽게 하는구나.

돈이 많으면 사랑을 살 순 없어도,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진다.

아, 그러고 보니 돈으로 사랑을 살 수도 있다. 여기에 시간만 좀 더 투자한다면.

몇 백 년까지는 아니라도, 그래도 좀 살아본 바로는 여자들은 모두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것 같다. 여자가 느끼는 남자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여성의 인권이 향상되고, 알파걸이라 표현되는 여성 상위 시대라 할지라도 임신을 하는 생물학적 특성과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 고유의 역할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니, 역할은 바뀌었겠지. 어느 정도는. 다만, 그 기대가치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저래야 해하는 것은 오히려 남자가 남자에게, 여자가 여자에게 더 많이 강요한다. 우리 삶이 그렇지 뭐.



사랑을 하면 젊어지는 이유를 고민해본 적이 있다.

보통 사람들도 사랑을 하면 겉모습이 변한다. 젊어지는 효과도 분명 있다.

물론, 우리 부류의 사람과 같이 실제로 시간을 되돌려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효과'다.


누군가에 호감을 느끼고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생물학적인 성적 욕구는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역할이다. 성호르몬들이다. 다만, 이것이 ‘단순 욕망’의 것이라고 보면 ‘지속적인 끌림’이 사랑의 조건이다.

'끌림'을 이끌어 가는 주역은 도파민, 노레피네프린(아드레날린), 세로토닌이다. 도파민은 니코틴이나 마약에 의해서도 활성화되는 것들이다. 하지만 역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아드레날린과 세로토닌이다. 매력적인 녀석들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결혼으로 이어진다. 결혼이 연애의 끝이냐, 또는 연애의 과정이냐를 두고 말이 많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옆에 붙잡아두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책임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제도가 결혼이다. 결혼(이든 동거든, 약혼이든...) 또한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로, 인류는 그 정당성과 효과에 대한 결단을 보류해왔다.


이렇게, 제도를 활용해서라도 더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우리의 머리 속에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자기네들이 더 아우성이다. 옥시토신은 모성애와도 관련이 있고, 섹스를 종용하기도 한다. 번식과 관련된 존재들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 마약에 빠진 사람의 뇌 활성화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고 한다. 물론, 이별이나 연인을 상실했을 때 뇌의 모습은 마약이 끊긴 금단현상을 겪는 사람의 그것과도 거의 일치한다.


호르몬이 나와서 사랑을 하게 된 건지, 사랑을 해서 호르몬이 나오는 건지는 절대자만이 알 일이다.



잠깐.

글을 쓰고 있는데 손이 쭈글쭈글 해진다.

이런, 내가 사랑하는 그녀도...

어쩐지 매우 젊어 보인다 했다. 피부도 좋고.


그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자기에게 말을 안했냐고 한다.

자기도 말 안 했으면서.


억울하단다.

자신은 좀 더 많은 남자들을 만났어야 했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이젠 좀 지겨웠기도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아침에 짐을 싸서 당장 오라고 했다.

하루에 10년씩 늙게 되니, 우린 일주일 안이면 세상과 이별을 고할 것이다.


남은 여생, 아니 남은 일주일을 함께 보내자고 했다.

손 잡고 누워 마지막 날을 함께 맞이하는 것.


툴툴대며 알았다고 한다.

목숨이 달린 일인데, 사랑하니 설득이 된다.


일주일 뒤에 나는 드디어 절대자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난 반드시 물어볼 것이다.


사랑이라는 걸 왜 만들었으며.

사랑을 통해서 당신이 바라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 당신이 만든 그 사랑과 같은 것인지를.

그리고 절대자인 당신도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또 사랑하는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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