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만화영화 둘리였다. 아니, 요즘 아이들이 둘리를 알까? 왜 둘리를 모티브로 광고를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둘리 말고 다른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고길동이었다.
어릴 적 재미있게 둘리를 볼 땐 안중에도 없던 캐릭터. 아니, 오히려 둘리와 친구들을 괴롭히는 못된 어른. 모자란 아저씨. 잔소리로 무장한 꼰대로 각인된 악당 캐릭터.
그러나 이제는 어쩐지 고길동에게 더 눈길이 간다.
머리숱은 그대로지만 입가에 선명해진 팔자 주름이 남의 것 같지가 않다. 고길동의 둘리에 대한 구박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그는 정말로 책임감 강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가장.
평범한 직장인.
만년 과장.
외벌이.
아내와 두 아이 외에 조카와 아기 공룡 그리고 그의 여럿 친구들까지 책임지는 사람.
그러나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에피소드가 이어지기 위해 작가는 그를 가만둘 수 없었는 모양이다.
아이 담임교사 가정방문이 있는 날, 진공청소기로 고길동의 옷과 머리를 밀어 벌거숭이로 만든 일.
출근하려는데 물 호스로 얼굴을 가격하고, 구입한 지 이틀 된 카메라를 망가뜨리고, 고길동의 선풍기를 훔쳐 아프리카로 도망간 일. 고길동이 목숨처럼 아끼며 수집하던 레코드판 50여 개를 접시 돌리기로 날려 버린 일까지. 시대적 배경을 봤을 때 그 경제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밖에도 고길동이 소중히 여기던 낚싯대, 구두, 여러 수집품들은 맥없이 망가지고 또 망가졌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강했다.
<얼음별 대모험> 편에서 그는 칼보다 무딘 가시고기 뼈만으로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웠다. 어느 우주 해적이 "이제 넌 내 밥이다!"라고 말했을 때 고길동은 "에라이! 개밥 같은 소리 하고 있네!"로 응수했다. 염라국의 수많은 병력을 상대로 싸우던 그의 손에 있던 건 고작 연탄집게 하나였다.
"마! 내가 홍콩영화 한두 편 본 줄 알아?!!!"
동심은 아름답지만 현실과 맞진 않는다.
동심을 대표하는 둘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고길동은 현실을 담당했다. 어릴 때에는 동심보다 현실을 내세우는 고길동이 미웠지만, 이제 나는 현실에서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되었고. 그 현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강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