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수는 국가 수와 비례할까?
지구 상 전 세계 국가 수는 UN 등록 기준 193개, 세계 지도 기준 237개, 국제법 기준은 242개다.
하지만 각 국가의 언어는 그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보다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국가 수보다 언어가 많은 경우는 국가 탄생의 역사적 과정에서 생겨난 부족어를 모두 포함할 때다. 예를 들어, 미국의 원주민 부족 수는 40여 개가 넘었었는데 그 부족 언어를 다 인정한다면 원래 미국의 언어는 수 십 개라 볼 수 있다.
반대로, 국가 수보다 언어 수가 적다는 건 하나의 언어를 여러 국가가 공용으로 쓴다는 뜻이 된다. 예를 들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국가는 현재 약 73개다.
이처럼 언어 수는 세계 각 국가 수와 비례하지 않고, 역사적 관점이나 문화적 융통성에 따라 그 수치와 의미는 합종연횡될 수 있다.
멕시코는 멕시코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
'고래는 바닷물이 짠 줄 모른다'란 말이 있다.
지식의 저주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남도 알고 있을 거라거나, 내가 알고 있는 게 다인 줄 아는 우리의 통념을 빗댄 말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한글', '한국어'를 사용한다.
당연히 각 나라에는 저마다의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모든 국가는 각자의 모국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지식의 한계는 그 경계를 드러낸다.
나는 중남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세계를 무대로 일을 하는 해외 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고 유럽 주재원을 거치기도 했지만, 어쩐지 중남미에 갈 일은 아예 없었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서 보는 중남미 국가가 내게는 전부였고, 뉴스에 나오는 치안의 불안이 내가 아는 중남미에 대한 어렴풋한 지식이었다.
그런데 내게 멕시코 주재 발령이 어느 날 갑자기 내려졌다.
'멕시코... 멕시코라고?'
믿을 수 없는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나는 스페인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멕시코는 멕시코 말이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영어로 하면 될 텐데...'
유럽에서 조차 나는 영어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간혹 독일, 프랑스나 스페인의 소도시에서 의사소통이 안된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손짓 발짓 정도의 차이이지 결국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달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는 이야기가 좀 달랐다.
모국어가 분명히 있는 나라라면, 오히려 영어가 통한다. 그러나 모국어보다는 공용어를 쓰는 나라에게. 그것도 스페인어라는 전 세계 약 5억 3천만 명이 쓰는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영어 사용의 정도가 불 보듯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내가 부임할 법인의 내부 모든 회의도 스페인어로 진행된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상황.
오히려 유럽 스페인 법인에서는 영어를 사용했었는데...라는 변명은 주재 발령이 난 이후 2개월 만에 부임해야 하는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 주절거림이었다.
그럼, 왜 멕시코는 스페인어를 쓰는 걸까?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꼭 스페인만을 가는 게 아니라, 멕시코를 포함한 다양한 중남미 국가로도 발길을 향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스페인어는 스페인에서만 쓰는 게 아니라 영어와 같이 많은 나라에서 공용으로 쓰이고 있다는 말이다. 재밌는 점은,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 유독 중남미 나라에 스페인어 사용국가가 몰려 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비단 멕시코만을 위한 게 아니라 중남미 전역에 걸쳐 적용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제야 무지했던 내 지식들이 하나하나 모이고 합쳐졌다.
'총. 균. 쇠', '스페인 무적함대', '에르난 코르테스', '스페인 식민지' 등. 갑자기 '조선어 말살정책'이 겹쳐 떠올랐다. 잘 알려져 있듯 일본은 우리나라를 완벽한 식민지 국가로 만들기 위해 민족말살 정책을 펼쳤고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언어 말살에 가장 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독립 전 1944년까지의 일본어 보급률은 30% 이하 수준에 머물렀다.
멕시코가 스페인어를 쓰는 이유.
어찌 보면 같은 역사적 고통을 겪은 국가의 국민으로서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기에 조심스럽다. 그러나, 언어의 수용과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문화의 융성엔 맞고 틀리고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오롯이 저마다의 몫이기도 하니까.
멕시코가 스페인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 풀어놓을 봇따리가 한 둘이 아니다.
16세기 초 에르난 코르테스의 입성과 아즈텍 문명의 멸망. 그 전후로 이어지는 역사적 이야기와 현재 멕시코에서 스페인어가 갖는 위상까지.
공부하고 알아보고 이해할 것들이 한가득이다.
'인간은 국가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언어 안에서 살아간다'라는 말이 있다.
카탈루냐 작가 자우메 카브레의 소설에 나오는 말로, 스페인 영토에서 스페인어 사용을 거부하고자 하는 작가의 생각이 제대로 묻어난 표현이다.
멕시코는 스페인어라는 언어 안에 살고 있다.
스페인어를 아직 제대로 구사하고 있지 않은 나는 그 언어 안에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 언어와 문화를 좀 더 이해해 가다 보면 나는 아마도 그 안에서 온전히 살아가진 못하더라도, 그 삶이 무엇인지는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멕시코 땅을 밟았다고 멕시코에 살고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멕시코가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 언어가 이 나라 사람들에게 주는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도 남아 있는 부족어들의 위상과 그 옅어지는 색채가 주는 시사점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다 보면 나는 마침내 멕시코 안에 동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 주어진 몇 년간의 시간.
온전히, 진짜 멕시코를 만끽해보자고 다짐한다.
그 시작은 스페인어를 말하는 것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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