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낯선 그때. 머리가 지저분하게 길어 있던 걸 발견했다. 부임하고 일을 따라잡기 위해 몰두해 있을 때라, 머리를 어디에서 깎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알 겨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한국 헤어 디자이너분을 수소문할까 하다가, 지저분한 머리를 지금 당장 어떻게 하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이 올라왔다.
자주 가던 몰에 헤어숍이 있었는데, 주말 어느 하루 날을 잡아 그곳을 방문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건 명품회사 수석 디자이너와 같이 생긴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였다. 백발, 반듯한 양복, 하얀 구두와 검정 앞치마.
'오, 감각 있어 보이는데?'
나는 그에게 헤어 스타일 북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전문가의 향기를 풍기며, 걱정 말라고 말하며 자신의 머리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잠시 눈을 감고 바쁜 업무를 생각하기로 했다.
짜잔.
내가 잠시 감은 눈을 떴을 때. 그러니까, 바쁜 업무를 아주 조금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난 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동양의 어느 나라라고 특정하진 않겠다.) 매우 이국적인 모습에 나는 내 두 눈을 의심했다. 내 머릿결이 구사할 수 없는 까치 머리에,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앞 머리.
이것은 충격이었고, 가격은 공포였다.
내가 지불해야 했던 금액은 50유로. 당시 환율이 1,450원가량이었으니 나는 우리 돈으로 정확히 72,500원을 겪어보지 못한 까치머리에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그 헤어 디자이너의 머릿속에 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분명한 건, '동양 남자' 스타일에 '한국'은 없었다는 것이다. 기어이 사진을 고르거나, 아니면 휴대폰으로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보여줬어야 했다.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스타일은 나오진 않았을 거라 장담한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라고 해봐야, 이상하지 않을 정도를 원한 것이었는데도.
그 이후, 나는 수소문을 하여 한국에서 미용을 했던 분께 4년 간 내 머리를 맡겼다.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때론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충격과 공포까진 아니었다. 까치집 머리는 더더욱 아니었고.
가족이 오고, 아이들의 머리는 내가 손수 깎아 주었다.
네덜란드 미용실의 충격과 공포를 이미 겪었기에, 일본 미용실을 간 적이 있는데 일본 아이들이 되어 나오는 우리 아이들을 보고 또 놀란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4년 간, 나는 한 달에 한 번 아이들 전담 미용사가 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그때의 그 까치집 머리 사진을 보면, 나는 놀란다.
아, 내 머리도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구나. 내 머릿결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모양새인데. 아니, 어쩌면 그 네덜란드 헤어 디자이너는 실력이 더 뛰어난 것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스타일을 내게 선사했으니.
그래서 나는 타지에서 머리를 깎아야 할 때, 한국 디자이너 분을 끝까지 수소문한다.
더 이상의 충격과 공포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이상한 머리를 하고 한 달을 살아야 했던 그때의 나는 웃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