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은 나쁜 게 아니다. 그것은 내 지식과 생각의 고착화된 일종의 경계다. 그 경계는 내가 세상을 효율적으로, 빠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편견과 틀은 깨는 게 아니라 넓혀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아닌 이상, 어느 틀을 깼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낱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흉내 내려는 귀염 뽀짝 한 오만이다. 또한 그 틀을 깨면 생각의 체계가 무너지는 위험을 초래한다. 우리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과 지식으로 하나하나 쌓아온 것이 그 '틀'이자 '편견'이니까.
문제는 그것들에 안주하려는 우리 자신이다.
내 틀과 편견의 한계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새로 알게 된 것을 수용하여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멕시코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초' 요리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렇다면 멕시코는 나초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자고 마음먹은 것처럼.
앞선 글을 읽고 왔다면 알겠지만 '나초'는 우리가 아는 나초 요리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나초' 요리는 멕시코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아니, 만나봐야 정상이다.
다만, 그것을 부르는 방법과 용어가 다른 것이다.
당연히 식당 메뉴나, 마트 곳곳에서 마주할 거라 생각했던 '나초'란 이름이 없었을 때의 당황스러움. 내가 알고 있는 '나초'를 그렇다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모르겠는 답답함.
실재하고 있는 걸 지칭하지 못한다는 건, 그것을 말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자에게 있어 곤욕이자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신박한 경험의 과정이다.
눈에 불을 켜고 봤다.
그런데, 이름이 없다. 나는 이것을 '나초'로 알고 있는데... 정말 그 포장엔 '나초'란 이름이 없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을 나는 그래서 절실히 이해한다.
나초를 나초라 부르지 못하고...
그렇다면 대체 멕시코에선 '나초'를 뭐라고 부를까?
이번엔 두 눈에 불을 한 번 더 켜기로 했다.
무심코 지나친 것들을 발견해내기 위해. 확실히 한번 더 불을 킨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나초'라는 편견에 갇혀 보지 못한 것을 찾아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멕시코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나초'를 'Totopo'로 부른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나초는 멕시코에서 Totopo(s)로 불린다.
Totopo = Tortilla chip
(Masculine noun/ 남성형 명사) culinary(요리의), Central America, Mexico 어원
- 출처: SpanishDict -
'Totopo'란 단어를 봤을 때, 나는 'Todo(Everything)'란 단어를 떠올렸다.
모든 음식과 함께 잘 어울리는 또또뽀의 관대한 성격(?)을 떠올릴 때 더 그렇다. 다른 재료가 더 돋보이게 해 주며, 필수 영양소인 탄수화물을 섭취하게 해주는 겸손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Totopo'를 적으면 'all of it'으로 그 뜻을 보여주는 번역 애플리케이션이 있다.)
이로써 내 틀과 편견은 조금 더 넓어졌다.
몰랐던 것을 마주했을 때, 그 한계에서 마주하는 유쾌하지 않은 마음은 곧 호기심으로 바뀌고 그 호기심은 나를 어제의 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그것을 떠올리고 실천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알고 있던 '나초'뿐만 아니라 종주국에선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를 결국 알아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