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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11. 2022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곧 내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어릴 적,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부모가 된다는 건 자의의 선택 같지만 그리 간단히 말할 성격의 것이 아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것, 아이를 갖겠다고 합의하는 것 모두가 선택의 과정이지만 그 과정 모두가 결실을 맺는다고 보기도 어렵고, 결실을 맺는다 한들 그 난도와 버거움에 선택을 후회하게 되는 경우도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택'이란 능동적 단어를 쓰기엔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다.


남녀의 사랑은 '에로스'에서 '스토르게'로 넘어간다.

'스토르게'로 넘어온 사랑은 '아가페'로 승화되어야 한다. 뜨거운 남녀의 페르소나. 남편과 아내라는 페르소나. 엄마와 아빠라는 부모의 페르소나. 사랑의 단계가 변하면, 각각의 페르소나도 변화한다.


지독히도 개인적 성향이 있는 내 자아가 아이들에게 줄 사랑이 있을까?

나는 사실 부모라는 페르소나를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선택은 했지만 저돌적이진 않았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아이의 탯줄을 자르고 있었다. 그러나 탯줄을 자르던 그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 모든 게 변해있었음을. 


부모라는 존재는 아이를 마주할 때 비로소 그 정체성과 페르소나가 성립한다.

아무리 마음가짐을 제대로 해보려 해도, 아이를 만나기 전까지 그것들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아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끌림. 참으로 신기했다. 그저 나를 닮았다는 것을 넘어선 감각적 유대감은 인생을 통틀어 느껴보지 못한 무엇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며 서로 말이 통하는 것도 크나큰 희열이다.

손으로 받아 들어 세상을 향해 그저 울음만 내지르던 그 조그만 핏덩이가 말을 하다니!


내심 그러한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다칠까, 상할까, 근심을 가지진 않을까.

나는 무던히도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이들에게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어릴 적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듣지 못했던 말들을, 나는 아이들에게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심해'라는 말, '꿈을 크게 가져'라는 말. '돈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말', '순진한 것과 순수한 건 구분해야 한다는 말', '착하기만 해선 안된다는 말'...


내가 어릴 적,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몸소 세상에 부딪치며 깨달아온 말들을 아이들에게 던지며 나는 그것이 결국 내가 듣고 싶은 말이자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아마도, 이 모든 걸 설명하며 너희는 행복한 줄 알라고 말한다면 나는 좋은 아빠에서 아마도 꼰대로 전락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하기에, 구구절절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그저 어릴 적 나에게, 지금의 나에게도 필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알려줘야겠다고 다짐한다.


언젠가, 아이들의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때는 막연하게나마 나를 이해해주리라 기대하며.


참... 아이들에게 질투를 느끼다니.

어릴 적, 충분히 부리지 못한 어리광이 또 도지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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