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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Jan 07. 2022

나이를 먹으니 구슬픈 게 좋아진다.

구슬픔은 삶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의 특권이다.

휴일 날 일하기.

자발적 출근이었다. 공식 휴무일인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몇 개월간의 주재원 생활, 북적하던 사무실에 홀로 앉으니 큰 짐이었던 부담들이 하나 둘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사무실은 내가 힘들어하는 온갖 것들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을 빼고 나면 어쩐지 내 작은 무대와 같단 생각이 든다. 사람 때문에 힘든 것이 역시 직장생활이구나... 하는 걸 다시금 상기하며 혼자 피식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멕시코 노래였다. 청소하시는 여사님께서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큼지막한 블루투스 스피커에 휴대폰을 연결하여 음악을 틀고 일을 시작했다. 무슨 노래인지는 몰랐지만, 그 노래는 구슬펐다. 아무래도 사랑에 목마른 중년 남성이, 떠나간 여인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 같았다.


낭만적이라기보다는 구슬펐다.

그것을 따라 부르는 여사님의 목소리도 구슬펐다.


잠시 뒤, 나를 발견한 여사님이 화들짝 놀라며 스페인어로 뭐라고 말했다.

다행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일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Está bien. Ahora estoy disfrutando de la música."

(괜찮습니다. 저도 그 음악을 즐기고 있어요.)


그렇게 몇 시간을 나와 그 여사님은 구슬픈 노래를 흥얼거리며 각자의 일을 했다.

나는 그 노래를 전혀 몰랐지만, 그 구슬픈 가락에 생각과 마음을 빼앗겼다. 그 가락은 마치 어렸을 때 어머니 옆에서 듣던 가요무대의 그것과 같았다.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같은 구슬픔을 느끼다니. 사람의 정서란, 감정이란 국경을 초월하여 다 같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드니 신나고 흥겨운 것보다 어쩐지 이런 구슬픈 게 더 좋아진다.

이제야 왜 어머니께선 지루하고도 느릿한 그 선율을 좋아하셨는지, 가요 무대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봤는지를 알겠다.


구슬프다는 말은 '처량하고 슬프다'란 말이다.

영어로는 'Sad', 'Sorrowful', 'Pathetic'으로 풀이되지만 개인적으론 이 세 가지 단어를 다 합쳐도 '구슬프다'란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저 처량하지만도, 그저 슬프지만도 않지만 처량하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처량한 그 감정을 나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표현할 수 없음이 나는 좋다.

삶에는 설명하지 못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것들을 다 규명하려 하면 할수록 삶은 더 버거워짐을 나는 안다. 그저 구슬픈 가락 들으면서 흘러가는 것들은 흘러가게, 다가오는 것들은 다가오도록 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많은 것들을 후회하고, 또 앞날을 불안해한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을 나는 구슬픈 가락에 실어 허공으로 날려 버리는 것이다.


구슬픔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중년에게 카타르시스는 꼭 필요한 정화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눈으로 울 수 없을 때 나는 마음으로 울곤 한다.

아무도 모르게.

때론, 나 자신조차 모르게.


구슬픔은 삶을 어느 정도 살아본 사람의 특권이다.

슬픔이 있으니 기쁨이 있고, 기쁨은 곧 찰나이며 이내 구슬퍼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


특권 치고는 그리 없어 보일 수 없지만, 나는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구슬픔이란 그 선율과 감정을 조금은 더 사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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