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비유'와 '찰떡'이란 단어가 만들어 내는 이 말도 매우 흥미롭고 재밌다. 딱 들어맞는 무언가를 찰떡의 끈적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지금에야 화학적 또는 인위적으로 끈적함의 정도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시대지만, 이 말이 만들어진 어느 옛날을 돌이켜 보면 아마도 '찰떡'만이 찰지게 이러한 뉘앙스를 잘 표현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분이 상하다'란 표현은 내게 찰떡처럼 다가온다.
'기분'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아주 민감한 형이상학이다. 또한 '기분'이란 말은 '마음'과 연계된다. '마음'은 또한 어떤가. 나 조차도 알 수 없는 요동은 걷잡을 수가 없다. 이러한 변화와 요동에 '상하다'란 표현을 한 건 정말 대단한 비유와 표현이 아닐까?
언젠가 뉴스에서 상한 고기를 씻어 돼지갈비 양념에 버무려 팔다 적발된 식당 이야기가 나왔다.
당장엔 그 냄새와 상함을 가릴 수 있었겠으나, 걸쭉하게 떨어지는 양념 국물이 보기만 해도 개운치가 않았다. 숯불에 강하게 그을린 양념이 당장의 상한 고기 맛을 감출 순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 음식을 먹은 사람들에겐 어떤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우리는 상한 기분과 마음을 감추려 노력한다.
애써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억압된 감정은 언젠간 폭발한다. 새로운 양념으로 그 마음을 가려도, 상해버린 음식이 정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기분과 마음은 회복될 리 없다.
상한 것은 버려야 한다.
상한 것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돌아보건대, 상해버린 기분과 마음을 좋아지게 만들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었다.
결국 나는 아팠고, 그것들을 버렸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상해버린 음식과 기분을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또한, 실수라도 내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 사람의 기분이 다시 좋아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상해버린 내 음식이 정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이의 상한 기분도 좋아질 리가 없다.
만약 누군가와의 관계가 상했다면.
미련 없이 버리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음식을 차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진정 어린 사과나, 아니면 흐르는 시간으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