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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Dec 28. 2016

[쪽 소설] 습작 #1.

사랑이란 거 말이야

K는 돌아섰다.

등 뒤에 그녀가 있다. 그녀는 흐느끼고 있다. 흐느낌의 그것보다 많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K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추운 겨울이다. 양 손을 무채색의 두꺼운 코트에 깊게 찔러 넣고 있다. 그녀를 마주 보다 뒤돌아선 그 자세, 그것 그대로다. 뒤돌아선 이유는 간단하다. 아니, 간단하지 않다. 무겁다. 아니, 가볍지 않다고 할까.


그녀의 고백 때문이다.

젊었을 땐 그리 고프던 사랑이다. 누구라도 고백하면 덥석 사랑할 수 있었다. 돌을 삼켜도 소화할 수 있다는 그 나이 때는, 어쩌면 사랑 없이도 사랑할 수 있었을 거다. 그것마저 사랑이었음은 젊을 때는 모른다. 나이가 들어서야 안다. 인간이 불행한 이유다.

그녀의 고백이 K에게 갑작스러운 건 아니다. 내심 그녀가 고백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K는 생각했다.

'비겁한 놈. 나란 새끼.'

그 생각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올까, K는 윗 이로 아래 입술을 다급히 그리고 무겁게 눌렀다.


"사랑이란 거 말이야"

K는 운을 뗐다.


"사랑이란 거, 그거... 꼭 헬륨가스 가득한 풍선과 같아."

두 번째 운을 이은 K는 잠시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K의 말을 귀담아들으려는 듯, 그녀의 흐느낌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K는 고개를 좌측으로 조금 틀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헬륨가스 가득 찬 그 풍선은 하늘을 향해 가볍게, 둥실둥실. 낭만적으로 떠다녀. 사람들은 그걸 보고 갖고 싶다고 해. 어린아이마냥. 그 풍선을 손에 쥐면 어떻게 될까? 그거 말이야. 생각해봐. 아니, 그런 경험 있을 거 아냐. 처음엔 좋다가, 가지고 다니면 그리 귀찮을 수가 없어. 뭘 해도 걸리적거리고. 신경 쓰여. 실수해서 날아가진 않을까. 또 잘못해서 터지진 않을까. 행동에 제약이 엄청나지. 가방이라도 메고 있어봐. 급하게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봐. 무엇을 계산하기 위해 지갑에서 돈이나 카드를 꺼내야 한다면? 정말 귀찮고 거추장스러워. 풍선을 손에 넣은 아이들 중 대부분은 조금 갖고 놀다가 어느새 지들 부모님에게 들어달라고 해버려. 아주 이기적이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좋은 것만 잠시 손에 넣으려는. 사랑하는 사람들 다 똑같아. 애들처럼 무책임하지."


K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의 흐느낌이 조금씩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시간이라도 지나면 어떨까. 꽃처럼 시들어버려. 빵빵하던 그 모양은 쪼그라들고, 헬륨가스는 어느새 날아가. 공기보다 무거워진 풍선은 초라하게 땅에 떨어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먼지 가득한, 초라하게 쪼그라진 풍선 본 적 있지? 그게 바로 사랑이란 거야. 쓸데없는 거라고. 그거 그리 거추장스럽고, 시간이 지나면 추해지는 거. 그러니, 나란 사람 사랑하지 마. 더 좋은 사람 찾아가"


덥석.


K는 놀랐다. 그대로 서 있었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그를 얼려버린 것 같이. 그녀가 K를 뒤에서 꽉 안아버렸기 때문이다. 따뜻함에 얼어버린 갈팡질팡한 영혼.


정신이 혼미한 K를 두고, 뒤에서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좋아요. 나중에 그 초라한 풍선을 보며 한 없이 목놓아 울어도 좋아요.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하늘 향해 떠 있는 그 풍선, 잠시라도 갖게 해줘요. 그 기억이라도 있게 해줘요. 언제 시들까, 언제 땅에 떨어질까 걱정하는 것보다, 순간이라도 그 풍선을 가지고 함께 할래요. 행복하게요. 잠시라도. 사랑이 초라해질 풍선이라면, 어차피 다른 사랑도 그럴 거잖아. 그럴 거면, 나 당신이랑 사랑할래요."


K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새 그녀는 흐느낌 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흐느낌은 이제 K의 몫이었다. 못난 사람, 개똥철학으로 위대한 사랑을 꼴사납게 표현하며 도망가려 했던 K에게 그녀는 너무나 고결했다. 부끄러움과 자괴감. 그리고 고결한 그녀가 자신을 잡아 준 고마움에, 어쩌면 그 흐느낌은 부족했다. 대성통곡을 해야 죄 아닌 죄가 씻겨 가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K는 다시 뒤돌아 그녀를 덥석 안았다.




그 두 개의 풍선은 서로의 손을 잡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갈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터져버리거나 공기보다 무거워져 땅에 떨어질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근데 그래서 뭐.


영원하지 못할 거라고 애써 마주하지 못하는 종족들에게 사랑은 가당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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