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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Feb 12. 2017

체온의 중력

배 위에 포개어진 녀석의 체온이 참 따뜻하다.

따뜻했다.


누워 있는 내 가슴 위에, 포개어진 둘째 녀석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장난스레 아빠 침대라며 올라온 녀석은 말없이 잠들었다. 그도 그럴만했다. 오랜만에 내린 함박눈을 맘껏 즐기느라 우리 가족 모두 밖에서 신나게 뒹굴었기 때문이다. 피곤함도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차가운데서 돌아온 터라 따뜻함이 필요했을 것이다. 축 늘어진 몸뚱이가 제법 무거웠다. 많이 컸다고 생각했는데, 평안하게 자는 모습이 아직은 영락없는 아이다. 장난 삼아 '애기'라고 놀려대면, 자기는 '애기'가 아니라며 뾰로통한 그 입술도 영락없이 나에겐 '애기'의 그것이다. 보통의 포옹보다 중력의 힘이 좀 더 가해진 것이, 어쩔 수 없는 그 힘에 의해 좀 더 따뜻했나 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도 어쩔 수 없는 힘인걸 부모가 되어서 알았다.


그 따뜻함은 가슴을 벅차게 했다.


어릴 적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는 컸다. 너무 어렸기에 돌아가실 적 당시의 충격은 없었지만, 커가면서 스멀스멀 다가오는 그것은 인생의 쓴맛을 알게 했다. 스스로 깨닫는 것도 버거웠다. 누구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없다는 건, 상대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네에게는 무엇보다 힘든 일이다.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점점 더 커져갔다. 그래도 끝까지 우리 남매를 포기하지 않고 키우신 어머니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고도 남았다. 중력의 힘처럼 어쩔 수 없는 그 힘은, 아니, 중력보다 크고 위대한 그 힘이 나를 키운 것이다.

그럼에도 사내 간의 따뜻함이 그리운 건 사실이었다. 5살 언저리에 자동차를 그려주던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하지만, 흐릿하더라도 남은 하나의 추억은 강렬했다. 결혼 후 장인어른이 나를 안아 주었을 때 느낀 그 울컥함이 그 그리움의 정도를 대변하고 있었다.

사내 간의 따뜻함이 그리워서였을까. 사랑스럽고 소중한 두 아들이 나에게 왔다. 화목한 가정이 사무치게 그립던 내게 온 두 녀석은 행복 그 자체였다. 나는 겪지 못했지만, 좋은 부모가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려보자는 열망은 대단했다. 첫째 녀석이 태어났을 때, 그 가련한 몸뚱이를 배 위에 올려놓고 누워 한참을 울었다. 따뜻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에 대한 벅참도 있었다. 그 옛날 힘들었던 날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느끼던 찰나에 둘째 녀석도 그렇게 내 품에 오게 되었다.


그것이 삶의 무게일지라도.


그런 녀석들이 이제는 제법 커서, 나에게 학부형이란 또 다른 이름을 붙여주었다. 첫째는 제법 의젓하고, 둘째는 나와 와이프 앞에서는 천방지축처럼 까불다가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러워하는 내숭쟁이다. 몸무게도 상당해서 첫째 녀석은 안고 1분을 못 버틸 정도다. 둘째 녀석도 기껏해야 3분 정도, 차에서 잠들었을 때 침대방으로 옮기면 이미 기진맥진해진다.

그런 둘째 녀석이 오늘, 내 배 위에서 그렇게 잠든 것이다. 갑작스레 주마등처럼 지나간 지난 날들. 또다시 떠오른 나의 어린 날과, 녀석들이 태어난 그때. 다시, 중력의 힘으로 내 배위에 올려진 둘째의 무게는 상당했다. 등이 배기고 자세를 고치고 싶었지만 쌔근쌔근 잠든 아이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또 다른 삶의 무게를 예고할는지 모른다. 점점 커가는 녀석들을 위해, 내 어깨는 좀 더 무거워질 것이다. 아빠와 부모, 가장과 학부형 등의 역할도 처음이지만, 호기롭게 척척 해내야 한다. 그것이 삶의 무게라 할지라도, 내가 느낀 체온의 중력은 온몸에 배어 그것을 이겨내는 힘이 될 것이다. 우리 어머니 그렇게,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체온의 중력으로 나를 키웠을 테니까. 어쩐지, 오늘 둘째 녀석을 고단하게 해 준 함박눈에게 고맙다. 내 배 위에서 세상모르고 늘어져 자게 해준 중력에게 고맙다. 사람에게 체온이 있어, 서로 포개어져 있을 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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