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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르담 Mar 18. 2017

보이지 않는 손

결국 누군가의, 누군가를 향한 사랑

결혼 준비를 할 때였다.


지금은 와이프가 된, 당시의 나의 예비신부와 신혼집에 필요한 물건을 고를 때. 그때 알았다. 수건을, 양말을, 우산을 내 돈 주고 사는 건 처음인 것을. 이불도 그랬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것들도. 그러고 보니 내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들이 나도 모르게 내 주위에 있었다. 사사로운 물건들이 그랬고, 밖에서 지쳐 돌아와 앉은 식탁 위 따뜻한 밥도 그랬다. 내가 산 적이 없지만 냉장고 안에 빼곡한 신선한 과일, 어느 한쪽에 놓인 주전부리도 말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느끼고 깨닫고 말았다. 내가 바로 언급한 '손'의 존재는 무엇인지, 누구라도 미루어 짐작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다. 바로 어머니의 그것이다. 


이른 아침 출근길.


와이프는 바쁘다. 아침밥보다는 잠을 선택하는 나이기에, 와이프가 나를 위해 밥을 할 일은 전혀 없다. 그럼에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일어난 와이프는 분주하다. 아이들의 옷을 골라 바닥에 놓는다. 그 날의 코디다. 매일 아침 바닥에 놓인 옷들의 구색이 정겹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가 무언가를 만든다. 아이들 아침이다. 도시락도 싸고, 과일도 정성 들여 깎는다. 아침을 안 먹는 나지만, 출근 준비를 하다 그 음식 한두 점, 과일 한 두 개를 허겁지겁 집어 들고는 집을 나선다. 일찍 자라고 해도 말을 안 듣던 녀석들이, 아침에는 잠투정을 하며 힘겹게 일어나서 씻고는 익숙하게 바닥에 놓인 옷을 그대로 입는다. 졸린 눈을 비비며 집어 든 과일과 음식. 그리고 학교를 가기 위해 정돈된 가방을 집어 드는 일상의 연속.


보이는 손. 보이지 않는 손.


나는 와이프의 손을 그대로 목도한다. 그 손은 분주하다. 그러니 내게는 '보이는 손'이다. 반대로, 아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일어나면 누군가 옷을 골라 놓았고, 음식은 차려져 있고 가방과 준비물이 아이들을 기다린다. 언제나 가득한 주전부리 서랍은 와이프의 손으로 채워진다. 아이들의 옷, 양말, 수건, 우산 등. 내가 어렸을 적 '보이지 않는 손'에게서 받은 그것들을, 아이들이 고스란히 받고 있다. 

이 녀석들이 자라서 그 '손'을 '보게' 되는 시점이 언제일까.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 준비를 하는 그때일까. 아니면 군대를 가고 나서 일까. 또 아니면 일찍 철이 들어 사춘기가 지나고 난, 얼마 되지 않은 그때일까.

누군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은 세상을 움직인다 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 사람을 움직이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손'의 중요함은 그래서 대단하다. '보이지 않는 손'을 보게 될 때, 또는 그 '보이지 않는 손'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느끼는 삶의 고됨과 보람은 만감을 교차시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할 때,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오는 표현의 괴리감은 무언가를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의 또 다른 표현은 "보이는 사랑"일 수도 있겠다.


결국 그 '보이지 않는 손'의 의미는 누군가의, 누군가를 향한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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