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속에 아기를 위해서 먹어
더 이상 나는 1순위가 아니다.
평균적으로 20주 이내로 끝난다는 입덧이
나는 임신 6~7개월, 28주 가까이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임신초기에는 효과가 미미했던 입덧약이 점점 효과가
뚜렷해지면서 토의 횟수도, 토의 양도 줄어들어갔다.
하지만 전보다 낫다는 것일 뿐
여전히 나는 입덧의 굴레에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고
체중도 10kg가 넘게 줄었다.
그래서였을까?
시댁과 친정에서는 나에게 안부전화를 할 때마다
' 배 속에 아기생각해서 먹어야 한다.'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입덧이 심해, 애기가 잘 크겠어?'
'아기는 잘 크려면? 토하더라도 계속 먹어'
라고 말했다.
분명히 걱정하는 목소리와 분위기였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임신하는 그 순간부터 세상 모든 사람은 나에게 배 속의 아이의 안부만 물었다.
엄마의 컨디션은 아이를 위해서 챙겨야 했고
엄마의 밥은 아이가 잘 자라기 위해 먹어야만 했고
엄마의 체력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길러야만 했다.
물론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한 모든 행동자체가 엄마에게도 이로운 행동임을 알고 있다.
아이를 위해 챙기는 컨디션도 결국에 나의 정신건강을 긍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고
아이를 위해 먹는 것도 나의 체력을 챙기는 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는 저 안부의 말이 왜 그렇게 거슬리고 싫었을까?
아마도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존재가 우선시될 수없구나
확인받은 말이어서 그랬던 거였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아끼고 사랑했고 소중히 여겼던 것은 아니었지만
33년 인생동안 내가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등
'나'를 기준으로, '나'를 위해 살았는데
이제는 내가 아닌 ' 너'를 위해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말인 것 같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엄마가 되기로 한 순간 어쩌면 당연한 수순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니 더 이상 나는 1순위가 아님을 체감하게 되는 것 같다.
직장을 그만두고 (*계약직이라 육아휴직을 안 쓰는 관계로)
집에서 100% 육아만 할 때에는 부디 이 감정이 진해지지 않고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가길
내 아이와 함께하는 삶의 하루하루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1순위가 아니다.
적어도 내 아이가 한 사람으로 책임을 다하는 순간까지는 말이다.
당연하지만 조금은 슬픈,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현실에
배 속 너의 심장소리 들으며 기쁨과 위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