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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11. 2024

전세사기 하이 파이브

소화되지 않는 것들

 

전세 사기를 당했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건 8개월 전 일이다. 막 결혼 준비를 할 때였다. 신혼집은 구해놨고, 그전에 자취하던 전셋집의 방을 뺄 차례였다. 전세 계약 종료는 만기 6개월 전부터 통보할 수 있다. 나는 계약 종료 의사를 알리기 위해 임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뜻밖의 음성이 나왔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음 순간 나는 ‘아, 전화번호를 바꾸셨구나’ 생각했다… 곧이어 ‘아, 이 새끼 XX.’ 욕이 튀어나왔다. 그건 임대인이 튀었다는 얘기였다. 네이버 카페에 임대인 이름을 쳐보니 1페이지에 사기꾼이라 뜨던 기분이란… 나와 같은 사람들의 사연이 뉴스와 유튜브에 떠들썩하게 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 후의 과정들은 지루하고 험난했다. 보증보험 연장, 내용증명, 법원 공시송달 등 온갖 법적 절차에 통달했고, 기관들을 수없이 왔다 갔다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가 서류와 녹음 등으로 정성껏 증명해 내야 했다. 수십 개 서류를 제출하고 전 임대인 건설업자와 부동산에 따지면서 싸우고 ‘모르겠다. 그때 가봐야 안다.’ 라는 말만 반복해 듣는 나날이었다. 나는 성격파탄자가 된 듯 욕설과 화가 많아졌다. 내 임대인에게 당한 피해자는 최소 2~300세대. 보증보험이 있었지만, 100% 지급은 아니어서 불안이 컸다. 보험금 미지급 사례들을 찾아볼수록 기분이 끔찍해졌다. 




2억 2천만 원이란 사실 감도 오지 않게 컸고 세상의 발판이 흔들리는 규모였다. 평상시처럼 일하고 직장 동료와 스몰토크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다니던 광고 회사에서 내게 무슨 얘길 해도, (“어떤 컨셉을 고객들의 소구 포인트로 잡을까요?”) 나도 모르게 생각이 딴 데로 튀었다. 아니 지금 2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게 뭐 중요해? 이렇게 난 ‘언’ 프로페셔널해졌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고, 사람이 무서워졌다.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어 직장도 그만두었다. 한번은 우체국에서 내용증명과 공시송달 절차를 처리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우울하게 터덜터덜 걷다 넘어져 발목도 다쳤다. 그 돈을 잃고 내게 웃을 자격이 있는 걸까?란 생각에 잘 웃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평소처럼 씩씩하게 회사도 잘 다니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스님처럼 잘 해탈한 걸까 아님… 정신을 놓은 걸까? 걱정돼서 그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정말로 해탈한 거였다. 사기꾼을 원망하는 대신 “돈보다 우리 건강과 시간이 더 중요한 거야.”라고 반복해 말해주었다. 나는 그걸 자기 전에 곱씹었고 그의 말들을 수첩 맨 앞장에 적어놓았다. 그걸 지푸라기 잡듯 자주 들여다보며 서서히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       네가 힘든 거에 숫자를 매겨서 하나씩 처리해 봐. 불안과 우울, 그런 감정은 붙들고 있지 말고 그냥 놔버려. 멀리서 거리 두고 바라보는 거야. 

-       임대인한테 화날 필요도 없어. 어딜 가나 악인은 존재하고, 그걸 시스템으로 눌러야 하는데 그게 안 된 거지. 분노는 위를, 권력층을 향해야 해.  

-       ‘진인사대천명’이라고 불교 교리도 있잖아? 하는 데까지 해보고 그 이상 운의 영역은 우리가 터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충분히 노력했다면 결과가 어떻든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남편에겐 새로운 리추얼, 습관 하나도 생겼다. 그의 출근 전 모닝 루틴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침마다 거울 속 자신과 눈과 손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 라고 경쾌하게 외치는 거다. 매일 아침 죽상을 하는 내게도 나 자신과의 거울 하이 파이브를 억지로 시킨다. 축 처진 내 팔을 들어 올려 (무거울 텐데) 거울 앞에 갖다 놓아준다. 나는 억지 텐션이라며 투덜거렸다. 


“그냥 우리 둘이 하이 파이브 하면 되잖어.” 

“그것도 좋지. 근데 내가 나한테 힘을 주는 것도 의미 있어.”

“역시 개인주의자네.”


 하면서도 속으로는 감탄했다. 저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담. 경쾌하게 아침을 맞는 남편도 속은 힘들 것이다. 머리 싸매고 드러누운 아내 대신 혼자 벌며 매일 야근하고, 돈 아끼려고 중고 시장에 물건을 팔고,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마음이 어떨지. 나름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거울 속 ‘셀프 하이 파이브’를 하는 거겠지. 그의 손바닥은 말갛다. 먼지만 하고 미세한 빛이라도 우리에게로 끌어오는 듯하다. 그 손을 맞잡도록 내가 더 단단해져야겠다. 



나아가선 다른 피해자들의 손까지 잡아주는 방법이 뭘까 같이 고민하고 싶다. 나는 피해자 모임 단체 카톡방에 속해 있고 그들과 함께 어려움을 한탄하는 사이니까, 다들 남 같지가 않다. 모두 보증금을 돌려받아 단톡방에서 탈출하길 바란다. 차례로 사람들이 나가면 잘됐다 싶다가도 온전한 축하만을 해주진 못하는 복잡한 심경이 되기도 하지만. 나는 나갈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막막함과 불안이 찾아오는 일이다. 



그래서 전세 사기는 내가 겪은 일 중 가장 복잡한 사건 중 하나다. 피해자이지만 온전한 피해자일 수 없으며 (엄밀히 따지면 귀책 사유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사람이나 건강이 아니라 돈을 상실한 것이라 보기에 따라 큰 슬픔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자본주의 시스템의 허점을 노린 사회적 재난이다. 건설사-중개인-갭투자 꾼이 마음먹고 짜고 치면 일반인들이 대처하긴 힘들다. 마음 같아선 사기꾼들과 허술한 법 시스템을 잡아다 지옥에서 하이 파이브시키고 싶다. 당장 이 거대한 사기극에 대처하는 방법은 망할 내용 증명 절차들과 우리 두 손뿐이지만. 일단 오늘은 남편의 뭉친 어깨를 주물러준다. 우리는 손의 체온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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