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되지 않는 것들
필라테스의 유래는 동물의 움직임을 본 딴 것이다. 토끼, 고양이 등 20여 종류의 동물들을 관찰해서 조금씩 동작을 따와서 만들었다고 한다.
대학 3학년 때 나는 교양수업으로 필라테스를 들었다. 같은 과 친구인 혜, 성도 함께. 아쉽게도 나는 수강신청 정정 이슈 때문에 첫 수업을 빠지게 되었다. 나는 OT때 뭘 했느냐고, 과제 같은 건 없는지 친구들에게 물었다. 성과 혜는 친절히 말해주었다.
“어 너처럼 첫수업 빠진 사람이 많아서 다음 수업 때 자기 소개 다시 하기로 했어.”
“필라테스가 동물 몸짓에서 유래됐다는 걸 배웠거든. 그래서 동물 한 마리씩 정해서 그 동작을 따라해보면서 자기 소개를 해야 한대.”
“진짜로? 뭔 그런 쪽팔린 수업이 다있어? 너넨 무슨 동물인데?”
성은 날다람쥐, 혜는 학을 하겠다고 했다.
“학? 날개 달린 새 말이야? 참나. 무슨 십이 간지도 아니고… 동작을 하면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어. 교수님이 좀 엄격해보여. 제대로 해야 할 기세야.”
그때부터 며칠간 난 무슨 동물이 제일 무난하고 나와 어울릴까 생각하면서 보냈다. 인상이 순한 편이라 소, 양이 어울릴까. 아니 은근히 고집이 세니까 호랑이나 용? 당시 내가 추구하던 인간상은 토끼였다. 하얀 얼굴에 말간 토끼의 생김새를 닮고 싶었고, 겁이 많은 것이 나와 비슷해보였다. 어딜가나 귀를 쫑긋 귀울여 듣는다는 것도. 나는 이왕 이렇게 된거 완벽하고 임팩트있는 자기소개를 해내고 싶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말이다. 인터넷에서 토끼 머리띠를 검색해 주문까지 했다. 나는 평생 하지않을 ‘바니걸’ 따위의 이벤트 문화 때문에 토끼 머리띠 구하기는 쉬웠다.
필라테스 두번째 강의 시간. 우리는 체육관 강당에 모였다. 곳곳에 고무 매트가 깔려있었고 30명쯤 되는 학생들이 둥그렇게 모여섰다. 교수님은 마른 체형의 중년 여성으로, 카리스마 있어 보였다. 교수님이 첫 수업 때 안온 사람들 먼저 자기소개를 하라며 판을 깔아줬다. 아무도 나서지 않아 내가 먼저 나섰다. 쭈뼛거리며 강당 가운데 나갔다. 가져온 비닐백에서 주섬주섬 토끼 머리띠를 꺼냈다. 그걸 쓰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뭐지, 급격히 민망해졌다.
“저… 전 토끼로 정했는데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전 국문학과 10학번이고요. 토끼같이 통통 튀고 예민하게 포착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필라테스도 섬세하게 잘 해보겠습니다!”
그러고서 주춤거리며 쪼그려 앉았다. 후, 심호흡을 한번 했다. 용기를 끌어올려야 했다. 먼저 귀쪽에 두손을 펴서 올리고 잼잼거리며 깡총하며 토끼뜀을 뛰었다. (다행히 소리내어 하진 않았다.) 짧게 자기 소개를 마치고 다른 학생들을 둘러보니 입을 벌린 채 충격받은 표정들이었고, 교수님이 제일 얼빠져보였다. 잠시간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나는 당황해서 흔들리는 눈으로 친구들을 봤다. 성과 혜는 배를 잡고 미친듯이 웃고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당장 그들의 멱살을 잡고 해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수업 시간이라서 참아야 했다.
성이 한참 웃다가 앞으로 나섰다.
“저, 실례지만 해명을 드릴게요. 저희가 첫 수업 빠진 저 친구의 몰카를 해서요. (제정신인가?) 필라테스가 동물 동작에서 유래한거라고, 자기 소개도 동물 흉내 내면서 해야한다고 속였거든요. 푸핫… (지금 웃어…?) 친구가 너무 민망하게됐으니 저희도 의리로! 동물 흉내를 내겠습니다.”
하고선 날다람쥐처럼 양팔을 퍼덕거리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들어갔다. 다음으로 혜도 얼굴이 빨개진 채 사죄를 하며 학 흉내를 ‘학학’거리며 내고 들어갔다. 군중들은 싸늘한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한바탕 소동을 피운 국문과 망나니들을 교수님은 너그러이 용서해주셨다. 왠지 안도감이 커보였다.
“어 다행이네. 난 첨에 쟬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했다. 뭐, 이런 게 추억이 되겠지 안그러냐?
근데 필라테스는 동물에서 유래된 게 아니고, 재활 운동에서 시작된거다.”
교수님은 필라테스의 진짜 유래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성과 혜의 등짝을 때리며 난리를 쳤다. “야 진짜 미쳤냐? 너네 죽었어!”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우리는 한 학기 동안 그 수업을 듣고 필기 시험과 실기 시험도 봤다. 모든 건 기억에서 사라지고 자기 소개 시간만이 오래 남았다. 내게는 아직도 필라테스가 동물에서 유래된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바뀐 것이 있는데, 내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동물은 토끼에서 다른 동물로 바뀌었다. 그때에 비해서 나도 조금 자란건지 사이즈를 더 키워보고 싶어졌다. 거대하고 깊은 혹등 고래, 또는 탄탄한 몸으로 뛰어다니는 말이 되고 싶어졌다. 나는 90년생 ‘백말’띠인데, 옛날부터 어른들에게 ‘백말띠는 드세다’라는 세뇌성 발언을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말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는데 내 12간지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애정이 더 생겼다. 튼튼하고 몸집크고 잘 달리는 이 동물에. 다음에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큰 동물들을 흉내내볼 텐데.
성과 혜와는 아주 가끔만 보는 사이가 돼버렸는데, 내가 당한 입장이라 그런지 걔네들을 볼 때마다 필라테스 사건을 떠올린다. 그들은 아마 잊었을 것이다. 괴롭힘을 가한 사람은 잊는 법.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너넨 왜 하필 날다람쥐와 학을 선정했냐고. 왜 다른 것도 아닌 동물 흉내를 내라고 한 거냐고. 가끔씩 필라테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장난을 슬슬 건다. 나만 당할 수 없지.
“근데, 필라테스가 동물 동작에서 유래했다는 거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