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되지 않는 것들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어 넘기듯이 울적한 기분을 씹어 없앤다. 입에서 이빨과 부딪히면 갖가지 소리를 낸다. 아! 몬드, 아~몬드, 아?몬드가 똑-똑- 터지고 갈색처럼 고소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진다. 아침 기분이 가라앉아있다가도 약간 경쾌해진다. 한 알 두 알 인생도 씹고 나도 씹고 나쁜 놈들 생각도 씹는다. 그런데 한정 없이 아몬드를 50개쯤 100개쯤 먹을 수는 없다. 그쯤 먹으면 배불러서 배탈이 날 것이다. 딱 10알까지만.
그럼 그 이상의 우울한 감정은 어떻게 씹어버리지?
평소 나는 예열이 오래 걸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몬드를 손에 담고 하나씩 씹으면서 기다려본다. 내 기분이 준비가 될 때까지. 매일 한 번에 10알씩 집는데, 이젠 눈감고도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면 10알이 모여있다. 오늘도 성공했군, 개수를 정확히 집는 나 자신이 뻘스럽게 뿌듯해진다. 견과류를 자주 먹어야 건강해진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식단에 추가하게 된 루틴이다.
효능으로는 불포화지방산, 비타민 E, 철분, 칼슘이 풍부하고 노화 예방에 좋단다. 다른 견과류는 어떠냐고? 호두는 생각이 더 많아질 것만 같고, 피스타치오는 가격대가 높고, 캐슈넛은 지방이 많은 느낌이고, 사차인치는 씁쓸한 맛이 잘 적응이 안 된다. 역시 아몬드가 특출난 장점은 없어도 단점이 딱히 없는, 내 취향 견과류다.
아몬드는 나와 닮은 면도 있다. 자세히 보면 껍질은 까끌까끌한데 종잇장보다 얇아서 바스락 흩어진다. 안에는 매끈하고 딱딱하다. 겉과 속이 다르다. 나 또한 언뜻 보면 밝아 보이지만 타고난 체력과 에너지가 적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 쉽게 에너지를 잃고... 어떤 일을 하건 다른 곳에 쓸 에너지를 좀 비축해 놓아야 한다. 한계를 100이라 치면 80-90 정도로 해야 한계에 부딪히지 않는 느낌. 가끔 한계로 가는 느낌이 궁금하긴 하다. 견과류를 먹고 살며 에너지가 적은 소동물처럼, 최선보다 조금 아래만큼 쌓인 에너지로는 쳇바퀴를 몇 시간 돌릴 수 있으려나 머리를 굴린다.
보관 방법을 봐도 그렇다. 아몬드는 다른 음식의 냄새를 잘 흡수하니 밀봉해서 보관하라고들 한다. 나처럼 예민한 개체가 아닌가? 다른 사람과 환경에 잘 옮아서 쉽게 쩐내가 나는 사람 말이다. 나는 무균실 같은 집에서 혼자 프리랜서로 일하는 게 잘 맞다. 봉지에 담아 밀봉하면 외롭기도 하지만… 내 향기를 보존할 수는 있다. 그 힘으로 내게 더 맞는 관계를 찾아갈 수 있다. 언제까지 프리랜서로 살진 모르겠지만, 싱싱함을 잘 보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몬드는 지구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와 다르다. 즙은 아몬드유가 되고, 가루는 밀가루를 대체할 수 있어 비건 케이크, 비건 빵이 되고, 껍질까지 먹을 수 있어 쓰레기도 안 나온다. 책, 옷, 빵 봉지 등 온갖 쓰레기를 배출하는 나와는 매우 비교된다. 사람은 쓰레기를 의식적으로 줄일 순 있어도 완전히 없애진 못하고 자취를 남긴다. 하다못해 온라인상에라도 기록을 남긴다. 아몬드는 그런 거 없고 깔끔히 사라진다. 그처럼 쓸모 많고 알차면서 흔적을 덜 남기는 한 알이 될 수 있을까?
또한 그것은 성분표가 없고 독립적인 이름 자체로 존재한다. 땅의 성분인 여러 광물과 습기, 온도 전체가 이 한 알들 안에 담겼고 난 이 지구의 햇씨앗을 삼키는 것 같다. 그러면 우주의 일원이 되고 내 몸이 씨앗이 자라는 땅과 물과 우주가 되고. 그만큼 작은 한 알에 많은 것이 농축돼있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빅뱅이 일어날 것처럼. 왠지 함축적이고 시적이다.
매끄럽거나 갈라져 있고 가끔 우그러진 모양을 가진 것까지 모두 아몬드로 불린다. 모양을 보면 양쪽 끝(어디가 위아래지?)이 뾰족해서, 내 눈과 닮았다. 두 눈을 가늘게 떠서 그걸 뚫어지게 바라본다. 부엌의 거울을 보면 내 눈이 우주처럼 보인다. 울적하던 기분은 어느새 우주 밖으로 아몬드 가루로 흩어져있다.
오늘의 할당량을 먹고 나면 이빨이 의지할 곳이 사라져 허전하고 울적해지기도 한다. 열심히 씹던 이빨이 까끌거리고 심심해지면 또 내일 씹을 아몬드를 기다린다. 24시간이 지나면 내일의 할당량을 다 씹어 없앨 것이다.
세상엔 씹고 싶은 게 너무 많지만 딱 10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