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되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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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컴 타자 연습을 할 때가 생각난다. 단어 하나하나 분절되는 장면. 우리는 밀레니얼 세대로, 2000년대 초반 초등학생 때 컴퓨터교육을 받았다. 40명 학생이 다 같이 컴퓨터실에 모여서 한컴 타자 게임을 했다. 교육용 프로그램이 그것 말곤 별로 개발돼 있지 않았다. 앞뒤 양옆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선생님은 교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게임이라 불리지만 사실 재미가 없는 훈련, 노동이었다. 초등학생이 알 필요도 없는 어려운 한자어들 -비애, 음각- 이 비처럼 마구 쏟아지면 놓치지 않고 시간 내에 빠르게 쳐서 없애야 했다. 또 폭우같이 내리던 시어들. 화면 중간엔 남은 시간이 표시되었다. 언제까지 쳐내고 있어야 하나 생각하던 메밀꽃 필 무렵, 서시. 뭔가 문학적이던 시어들을 뜻도 잘 모르면서 쳐냈다.
‘소화’란 단어 뜻도 잘 몰랐다. 소화, 소화. 발음이 예쁜 것 같기도 했다. ‘불 화(火)’ 같기도 했다. 아니면 작은 꽃? 짧은 한자 실력으로, ‘소’만 보면 ‘대’의 반대말인 줄 알았던 나이였다. 소리-대리, 소문-대문, 소망-대망. 소화의 반대말은 대화. 소장에서 소화를 시키고, 대장에선 대화를 시키는 걸까? 소화보다 큰 건 뭐지?
어릴 때부터 남의 불행, 슬픔에 지나치게 이입하는 면이 있었다. 내 것도 소화 안 되는 통에 남이나 엄마의 것까지 쉽게 전염이 되어 속이 부대꼈다. 그래서 더 과부하가 걸렸던 것 같다. 8살의 일기장을 보면 “나는 불행하다.”라고 쓰여 있다. 그 단어 뜻을 확실히 알았던가? 남의 불행과 나의 것을 구분하지 못했을 수도. 8살 때 나는 거리를 지나갈 때마다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엄마, 저 사람을 왜 안 도와줘?”
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저씨 아줌마, 노인들은 우리보다 어려워 보였다. 나는 연민을 느낀 채 그 앞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기어이 엄마를 불러세우고 우리껄 나누자고 눈으로 말했다. 엄마는 어떨 땐 동전이나 지폐를 내밀었고, 어떨 땐 지나쳤다. 너무 그렇게 다 줄 필요 없다면서.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 사람들이 내 속에 오래 남고 지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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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갈수록 몸과 마음이 연결돼 있다는 걸 체감했다. 내 심장, 마음이 곧 소화기관 같았다.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먹는 몸과 정신. 회사에 다니는 동안엔 일상이 물 먹은 휴지처럼 쳐졌다. 예전 회사에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동료가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다들 호불호가 없고 무던한 성격이어서 유일하게 ‘호’를 강하게 표시했던 그 사람(김치찌개)의 의견에 따르곤 했다.
“오늘 점심 뭐 먹지?”
“김치찌개 어때요?”
그렇게 우리는 1주일에 2~3번씩 김치찌개만 죽어라 조졌다. 몇 달 후엔 다들 김치찌개에 녹다운이 되어 다시는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얼마 전, 그 시절의 동료를 만났다. 그와 나는 오랜만에 만나도 김치찌개로 하나가 되었다.
“어우, 그 찌갯집은 몇 년 동안 안 먹어도 입안에서 그 맛을 생성해 낼 정도야.”
“생각만 해도 토나온다.”
영화사에 다닐 때도 인근 직장인들 대부분 백반집이나 국밥집에 갔다. 점심시간마다 쌓인 화를 풀려는지 이열치열로 찌개를 먹는 것 같았다. 화가 더 나지 않나? 싶었지만 따라갔다. 순댓국, 순두부찌개, 해장국, 부대찌개는 한국 직장인의 소울푸드이자 무난하고 안전한 선택이었다. 추운 날에도 더운 날에도 “오늘은 국물 먹을까?”, “부대찌개에 라면 사리 가자.”
양푼에 넘치게 끓여대는 김치찌개는 짜면서도 밍밍한 게, 희한하게 성의 없는 맛이었다. 김치 향이 나는 물 같았다. 김치와 돼지고기 조금, 나머지는 맹물과 숟가락들에 딸려 온 아밀라아제 같았다. 내가 막내급이라 메뉴 선정권이 없었던 게 한이다. 모두가 맛있게 먹는 걸 나는 싫어한다는 게 멋쩍기도 해서 맛있는 척 먹었다. 점심 시간엔 대화를 안 하거나 겉도는 대화를 했다. 일 얘기나 날씨, 요즘 영화 드라마 얘기.
그런 분위기에서 찌개를 먹고나면 물배 찬 듯 더부룩하고 갈증이 생겼다. 나머지 오후는 더 고단하고 부글거렸다. 짠 음식들은 고체화 돼가는 소금 결정체처럼 몸 안에서 응고되었다. 사실 회사에선 남들과 비슷한 선택을 해야 좋다. 먹는 것부터 회의 의견 내는 것까지. 회사를 관두면서 아쉬웠던 점 중 하나는 메뉴 제안권을 얻기 전에 그만둔다는 거였다. 언젠가 몇 년 정도 그리스 장수마을 같은 곳에 가서 누적되고 강요된 음식들을 해독하며 살고 싶다. 고체들이 연하게 물러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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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도 대화가 별로 없었다. 부모는 “밥 먹을 때 말하는 거 아니야.”라고 했다. 근데 밥 안 먹을 때도 대화를 안 했다. 그럼 대화는 언제 하는 거지? 체한 듯이 조용한 가정에서 자라다 보니 생각의 속도보다 말의 속도가 느렸다. 말에도 로딩이 걸리니 매번 답답했다. 앞의 말을 생각하느라 맥락을 놓치는 적이 있었다. 그럼 꼴이 우스워지고 악순환이 됐다. 생각이 쌓이기만 하고 밖으로 표출되지 못했다. 이러다 터져버리는 걸까? 나는 표준 몸무게였지만 내 눈엔 불룩하게 보였다.
어색한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가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특히 많이 먹었다. 다들 뻘쭘하게 둘러앉은 와중에 남들은 전혀 신경 안 쓰고 열심히 안주 사이로 젓가락을 놀리던 모습. 어색한 (남녀) 미팅 자리에서 삼겹살을 먹고 크게 체해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 한번 체하니까 계속 체했다. 발목을 삐면 계속 그 부위를 삐는 것처럼. 고기와 밀가루를 한동안 끊고, 피자 1조각도 소화를 못 시켜서 밤중에 응급실에 가서 링거를 맞았다. 그렇게 체하고 자제하고의 반복이었다.
먹는 행위는 항의 같기도 하다. 자꾸 뭔가를 참는 나 자신에 대한 항의. 인생에, 가정에, 면접에, 회사에, 고독에 음식을 삼키면서 저항하고 있었다. 하고 싶던 말이 차고 넘쳐서 못 할 것 같으면, 울고 싶어지면 말하기보다 먹을 걸 밀어 넣는 방식으로. 나도 좀 뱉고 싶다. 근데 뱉어지지가 않아. 불편하고 어색한 자리에선 괜히 말을 꺼냈다 더 어색해질까 봐, 빈손과 입이 민망해서 계속 먹은 것이다.
남을 신경 안 써서가 아니라 신경을 너무 써서 많이 먹었고, 그럼 더부룩하고 불쾌해졌다. 자학 대신 과식. 인풋만 있고 아웃풋은 없던 상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토해내고 싶었던 건 다 뭐였을까. 그건 내 몸 안에 있고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예민한 나는 양을 조금씩 먹기로 자주 다짐한다. 몸이 받아들일 시간을 주고 싶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 쪼개는 걸 익히기 시작했다. 의미 단위를 받아들이기 쉬워지도록. 먼저 내 감정을 단어별로 정리했다. 기록할 때 슬픔이라고 쓰지 않고 화남, 억울함, 부끄러움, 박탈감 등으로 쪼갰다.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직독 직해로 (단어를 작은 단위로 끊어 읽는 법) 배웠던 것처럼 감정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정보가 너무 쌓였다면 기록보다 길게 글을 쓰는 것도 도움이 됐다. 이젠 말도 더 해보고 종이에도 풀고 싶다. 한컴 타자 연습하듯이 또박또박. 무생물도 글씨는 소화할 수 있을 테니. 나에게 대화를 거는 소화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