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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Oct 15. 2024

생일 날짜 바꾸기

소화되지 않는 것들


점을 보러 가는 건 내게 3단계로 나뉜다. 접근도와 난이도에 따라서. 

1단계는 타로 카드, 2단계는 사주, 3단계는 신점이다. 

타로점은 내가 대학생 때 이미 졸업했다. 이 서양 점술법을 5번 정도 체험하고 나니 심드렁해졌다. 그때그때 뽑는 카드에 따라 내 운세가 달라진다니 조금 의문이 들었다. 점 중에서도 전통과 체계가 있어보이는 사주로 넘어갔다. 대학 졸업 이후로 1년에 한 번씩 사주를 봤다. 유명 철학원이나 사주 집들에서 들은 얘기들은 비슷했다. 명리학이란 인생의 가이드라인을 주는 통계학이자 철학이었다. 내 성향과 운은 어느 정도 알았고, 이제 미래를 더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신점까지 보게 됐다. 예전 고 3 입시 시즌에 신점을 본 적이 있었다. 엄마를 따라간 점집은 뻘건 조명에 돼지 저금통, 일본 느낌의 기괴한 장식품들이 많았다. 풍성한 금빛 술들이 천장에 매달린 채 흔들렸다. 방문자들의 기운을 술 장식 사이로 가두려는 파리지옥처럼. 신내림을 받았다는 여자 무당은 사주와 신의 말을 섞어서 말했다. 


“역마살이 있어서 성인 되면 여행을 많이 다니네. 체력은 안 좋은데 여행을 좋아해.” (맞는 말이었다.) 

“대학은 재수 안하고, ‘ㄱ’자 이름을 가진 대학에 바로 들어가. (그대로 되었다.)

“3년 후엔 아버지가 승진해서 형편이 필 거야.” (연도까지 정확히 맞췄다.)

“너는 겨울나무 사주야. 외롭고 꼿꼿해.” (……?)


그날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 ‘겨울나무 사주’를 검색했다. 

[겨울 나무 사주 : 추운 겨울이라 외롭고 강직하고 꼿꼿하며 인생에 부침, 시련이 있다.]





2023년 계묘년, 올해 신점은 부천에서 보기로 했다. 작년 12월부터 지금 3월까지 안 좋은 일이 유독 겹쳐서였다. 액운이 껴있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없으리라. 전세 사기, 발목 부상, 재취업 실패 등을 연달아 겪으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마침 엄마가 용한 집을 추천해 준 김에 나섰다. 보통 무당들은 후미진 언덕이나 역 근처 낡은 빌라에 살았다. 이런 데가 풍수지리학적으로 좋나…? 



문을 여니 푸근한 인상의 60대 여성 무당이 맞아주었다. 개량 한복에 쪽 찐 머리를 단정히 하고서. 방 안엔 산신령, 부처, 보살 그림이 눈을 빛내고, 뒤로는 불교와 도교 문양들이 한 화폭에 섞여 있었다. 금고와 목탁 옆엔 타오르는 촛불이 이미 밝은 방을 더욱 밝혔다. 이 소품 중 어떤 것이 신을 부르는 데 가장 영험할까? 신의 영역에 들어온 나는 부정이 탄 존재일까 차라리 신과 가까운 존재일까. 테이블 위 쌀알과 오방색의 깃발들, 구슬들이 미세하게 흔들려 보였다. 



그녀는 내 생년월일을 묻고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쓰더니 쌀알을 쥐고 흔들다가 멈췄다. 

“집에 중고 물품이 너무 많아. (어떻게 알았지?) 다음 이사 갈 때 많이 버려놔. 지금 집주인이 급하게 집을 내놓으려 하는데, 이사하게 되면 동, 남쪽을 피해… 부부가 불성이 세고 불교 공덕이 높은 집안이야. (나는 불교 집안이다.) 둘 다 젊은데 기운이 없고 피곤하니 식습관이랑 건강 조심해. 여자는 심장 쪽, 남자는 혈관 쪽… 둘은 사업이나 투자하지 말고 꾸준히 현금을 모아야 해.” 


1시간 동안 쏟아지는 말들을 폰 메모장에 받아적다가 내 고민거리에 대해 입을 뗐다. 

“저, 제가 전세 사기를 당했는데… 돈을 다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

“받기까지 고생하긴 하는데, 80% 이상은 받겠네.” 

    듣던 중 위안이 되는 소리였지만, 이제 오방색의 깃발을 흔들던 그녀는 뒤이어 말했다. 


“근데 양력 운세가 안 좋아. 박복하고 고독해. 노력해도, 뭘 해도 안 되는 팔자여.”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음력 생일로 챙겨. 음력 운세는 그래도 좋네. 같은 겨울나무라도 좀 덜할 거야.” 


이 해결책을 듣자고 부천까지 왔나 보다. 내 생일은 12월 4일. 32년간 알아 왔던, 남들이 매년 기억해 주던 양력 숫자를 버리라니, 예상밖이었다. ‘박복’, ‘고독’ 두 단어가 귀에 음산한 파장을 일으켰다. 무당이 다음 말을 고르는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래. 개명도 하는 마당에 생일을 바꾸는 게 뭐가 대수랴. 바로 핸드폰 메시지를 보내는 상상을 했다. 친구들에게. 


‘얘들아. 올해 내 생일은 11월 30일이야. 음력 생일이 10월 20일이라 매년 환산하면 날짜가 바뀌거든. 괜찮다면 오늘 축하의 한 마디씩 부탁할게.’ 


모양 빠지지만 어쩔 수 없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생일 숫자가 내 신상에 박혀 존재를 규정해왔다는 거다. 숫자는 주민등록증과 등본, 여권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매년 케이크에 나란히 꽂던 숫자, 그리고 자동차 번호판 숫자인 1204. 남편은 중고차를 사러 가서 그 번호판을 발견하고는 내게 말했었다. 너 생일이랑 우리 차 번호가 같다고. 이거 운명 아니냐고. 그때의 난 해맑게 좋아했었다. 말에 힘이 있는 것처럼 숫자에도 힘이 있는 듯했다. 그 숫자를 아무 의미 없는 그림처럼 보기 위해 눈을 찌푸리고 있으니 무당이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춥고 외로운 대신 어쨌든 나무잖아. (또 저 말이네 젠장.) 강단 있고 올곧게 산다는 거지. 점은 큰 가이드일 뿐 마인드랑 생활이 중요해. 나쁜 건 피하고 더 좋은 에너지 쪽으로 가면 돼.” 




힘없이 웃어 보이고 점집을 나왔다. 지하철 좌석에 앉아 창문을 보았다. 지상을 통과하는 짧은 구간에 햇살이 밀려 들어왔다. 집에 와서 노트북을 켜놓았는데, 빈 문서에 커서가 바람 속 촛불처럼 깜박여 보였다. 엉킨 실 같은 무당의 말들을 워드 문서에 풀어내다가 두 단어가 떠올랐다. ‘양력 생일’, ‘겨울나무’. 


겨울나무는 정말 꺾이거나 시들지 않는가? 


겨울에 태어났다고 해서 꼭 겨울 사주는 아니다. 태어난 계절과 관계없이 ‘목(木)’ 자가 사주에 많고 ‘화(火)’ 기운이 적으면 거의 겨울나무 사주라고 했다. 눈보라 속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손발이 떠올랐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고독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한 나무였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겨울나무’ 노래를 배웠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사실 그게 나였다니 망할. ‘초록 바다’, ‘파란 하늘’, ‘옹달샘’ 이런 밝은 거였으면 얼마나 좋아. 




“나 이제부터 생일 음력으로 챙기려고.”

 퇴근하고 집에 온 남편에게 대뜸 선언했다. 뜨악해진 그에게 점집에서 들은 얘기를 설명했지만, 이성적인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점은 재미로나 보는 거지, 너무 가는 거 아냐? 사실 생일이란 것도 지인들, 사회에서 합의된 건데 매년 바꾼다니. 친구들도 번거로울텐데…” 

“세상엔 이성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영역이란 게 있어.”

“과학적 사고는 우연의 일치와 추측에 기대는 게 아니고 조건을 통제해서 검증하는 거야.”

이쯤되니 할 말이 없어졌지만 난 계속 우겼다. 


“뭐, 과학이 사람 마음 치유하고 인생 가이드도 줘? 절대적이란 건 없어. 그리고 사람 마음이란 게… 찝찝한 건 최대한 피하고 싶잖아. 내 생일이니까 내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있어.”


사실 중고 물품을 버리고 이사를 북서쪽으로 가자는 말도 하고 싶었지만 관뒀다. 결국 남편이 내게 져주긴 했다. 마음대로 하되 점괘에 너무 신경 쓰진 말라고, 미래를 한정지을 수 있다고. 나는 홱 토라져서 방에 들어갔다. 




나는 봄이나 여름 나무라는 결과를 듣고 싶어서 점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타고난 운명은 변함이 없었다. 갈수록 바꿔야 할 습관, 조심해야 할 것만 늘어갔다. 변수들이 발 디딜 틈 없도록 인생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당분간은 점을 보러 가지 않을 것 같다. 따를 가이드가 계속 생기는 것도 피곤한 일이니까. 자꾸만 신을 찾게 만든 신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생일을 바꾸는 테스트를 해보고 좀 덜 추워진다면 신을 용서해 줄 것이다.



겨울 나무가 몸이 차면 안 좋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따뜻한 차를 끓여와 홀짝홀짝 마셨다. 뿌리인 발엔 수면 양말을 신고 핫팩을 데워서 몸통인 배에 올려두었다. 가지(손발)까지 온기가 돌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나도 열매와 잎을 맺을 수 있을지… 어쩌면 내 몸을 땔감 삼아 따뜻한 불을 피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방 밖 거실에선 남편이 켜둔 TV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이 여기 와서 같이 보자고 나를 불렀다. 나는 먼저 메신저 속 생일 알림 기능에 들어가 날짜를 음력 생일로 바꿨다. 음력이니까 내년, 내후년도 내 생일은 매번 다른 날짜가 될 것이다. 그러고 달력창을 끄고 방문을 열었다. 


@still_hope_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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