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우연히 나를 찾는 시간

by 스틸앨리스

눈이 저절로 떠지는 시간, 새벽 5시쯤.

요즘은 알람이 필요 없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방 안에서 나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조용히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하루 쌓이는 루틴은 마치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흐르는 삶이 되어주었다.


창문 틈으로 아주 옅은 빛이 스며들고,

그 빛은 내 손끝과 마음 끝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간단한 명상을 하며 숨을 고르고,

짧은 운동으로 굳은 몸을 깨우고,

책 한 장을 넘기며 마음의 주름을 펼친다.


하루하루 닦아낸 듯한 이 루틴은

마치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흐르는 삶 같았다.

이렇게 규칙적인 루틴 속에서

예전과 다른 내 모습을 보았고 낯설지만. 반갑고 고마운 모습이었다.


아무런 의식 없이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쉴 때, 책 속 한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힐 때,

운동하던 손길을 멈추고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볼 때, 그 순간 나는 잊고 있던 나를 발견했으니 이런 루틴은 나를 살리는 습관으로 자리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아, 나는 이런 고요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 짧은 순간에 좋은 문장을 읽으며 "나는 이렇게 따뜻해지는 사람이었지."

루틴은 매일을 단단히 붙드는 버팀목이었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깨달음들은 나를 나에게 데려다주었다.


루틴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연히 나를 찾는 시간들을 조용히 기다리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자주 느끼는 감정 하나 또 있다. 삶에는 계획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더라.

그 순간들은 늘 뜻밖이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나는 그런 순간을 또 다른 ‘우연히 나를 찾는 시간’이라 말하고 싶다.


며칠 전, 퇴근 무렵 공방 문을 닫고 나서 잠시 골목을 걸었는데 늘 지나던 길인데도 그날따라 낯설게 느껴졌고 비가 막 그친 골목 바닥엔 반짝이는 물기가 남아 작은 가게의 불빛들이 그 위에 깃들어 있었다.

그저 평범한 풍경인데 마음 한편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지쳐있던 내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 나 이렇게 걷는 걸 좋아했지.”

바느질에 매달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잊고 있던 나를 그 골목 끝 어딘가에서 마주친 기분이었다.

계획한 데로 시간을 쪼개고 목표를 위한 시간표대로 움직이려 했던 몇 년의 시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늘 뭔가를 이루려 애쓰고 계획하고, 약속하고, 달려간다. 내게 산책도 그랬다.

그 계획 속 한 페이지처럼.


그러다 문득, 아무런 계획도 약속도 없는 순간에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보게 됐다.

공방에서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던 어느 날, 실이 매듭 져 꼬이고 또 꼬여 풀리지 않을 때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 순간 창문 너머 빗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고, 그 조용한 풍경 속에서 나는 ‘괜찮아, 지금 이대로도’

하는 마음을 느꼈었는데 그것 또한 하나의 우연이었다.


내가 애써 쥐려 하지 않았던, 그러나 나를 나에게 데려다준 우연. 우리는 때로 삶을 너무 꽉 쥐고 살아가고 그런 나를 대견해했고 루틴 데로 열심히 살 수 있었던 것도 감사했다.


내가 나를 찾는 시간은, 간절할 때도 찾아와 주었고 늘 그렇게 조금 풀어져 있을 때에도 찾아오는 것이란 생각을 했다.


'우연'이란 단어는 긍정의 느낌이 강해서 내게 좋은 에너지가 됐던 건 사실이다. 우리가 살면서 찾아오는 모든 감정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 보는 건 어떨까?

이런저런 내 모습을 찾아가면서 좀 더 유연해지는 연습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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