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기력
외모에 관한 피해의식을 생각해보자. ‘민서’는 뚱뚱했다. 학창 시절, 집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살 좀 빼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학교에서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해야 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민서’에게는 긴 시간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민서’에게 선물과 편지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설렘과 환희는 찰나였다. “이거 예은이한테 전해줄 수 있어?” 그때 ‘민서’는 알았다. 남자들에게 자신은 ‘여성’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을. 직장에서도 주변의 모든 관심은 날씬하고 근사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쏟아졌다. 그때 ‘민서’는 알았다. ‘왕따’보다 ‘무관심’이 더 큰 상처라는 사실을.
‘민서’는 외모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이 생겼다. “이제 사람들 안 만나고 혼자 있고 싶다.” ‘민서’는 오직 뚱뚱하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냉대, 그리고 무관심에 온몸이 베였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때면 그 스트레스를 다시 먹는 것으로 풀어야 했다. 그 때문에 살이 더 찐 ‘민서’는 점점 집안에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민서’는 지독한 악순환에 빠져버렸다.
‘민서’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유쾌하게 살아가기보다 홀로 방안에서 침잠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민서’는 왜 홀로 방안에 남겨졌을까? 피해의식의 악순환이 낳은 무기력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타자(나와 다른 삶의 규칙을 갖고 있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의 활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피해의식이 심한 이들이 타자가 있는 세상을 피하려는 이유도 이제 알 수 있다. 피해의식이 낳은 무기력 때문이다.
무기력이라는 자기방어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은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닫아버릴 만큼 무기력해진다. 왜 그런가? 그들의 무기력은 자기방어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민서’는 어떻게 자기를 보호하려 할까? 무기력해지면 된다. ‘민서’는 삶의 의욕이 생기는 것이 싫다. 삶의 의욕이 생기면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고, 또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서’의 이런 마음은 의식적인 차원이 아닌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민서’는 의식적으로는 “삶의 의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무기력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민서’의 이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민서’에게 삶의 의욕은 잠재적 상처다. 조금이라도 삶의 의욕이 생기면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부모, 선생, 친구, 동료에게 지독히도 상처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민서’에게 삶의 의욕은 잠재적 상처, 즉 예정된 상처일 뿐이다. 그러니 ‘민서’가 삶의 의욕을 없애 예정된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피해의식은 무기력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때로 무기력해짐으로써 아직 치유되지 않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서’는 알고 있을까? 방안에 혼자 남겨진 삶은 필연적(100%) 불행이지만, 타자를 만나러 가는 삶은 가능적(50%) 행복이라는 사실을. 방안에 홀로 있으면 안전할 것 같지만 이는 결국 100% 불행해지는 길이다. 반면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매 순간 50%의 행복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민서’의 상처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사람이 분명히 있다. (‘민서’가 만났던 타자 전체로 통계를 잡으면 50%에 훨씬 못 미치겠지만) 타자를 만나는 매 순간, ‘민서’를 사랑해줄 사람을 만날 확률은 50%나 된다. 무기력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할 때 그 행복할 50% 가능성은 사라져버리고 100% 불행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피해의식이 무기력이라는 얼굴로 우리를 찾아올 때 불행의 전주곡인 이미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