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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의 철학

'썸'을 타고 계신가요?


‘썸’의 설렘


“나, 요새 썸타고 있어”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다. 썸을 탄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리도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걸까? 일단 ‘썸을 탄다’는 것은 연애 관계에 돌입하지 않았지만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두고 남녀가 만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썸이란 것이 설레는 일은 동시에 대단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썸의 조심스러움은 연애를 시작하려고 할 때 피할 수 없는 내밀한 세 가지 감정과 관련된다.


 첫째, 상대에게 나의 감정을 먼저 드러내는 것 혹은 들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썸을 탄다는 것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지만 그렇다고 나의 감정을 먼저 드러내놓기는 뭔가 부끄럽고 창피한 그런 관계다. 둘째, 자칫 너무 급하게 상대에게 다가가면 혹시 상대가 부담스러워 멀어져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셋째, 그렇다고 나의 감정을 너무 숨기느라 상대에게 어떤 여지조차 주지 않게 되어 상대가 떠나 버리면 어쩌나하는 걱정이다.      


 썸의 본질은 앞서 말한 내밀한 세 가지 감정과 결부된 조심스러움이다. 결국 썸이라는 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만큼의 호감이 있는지에 대해 명시적으로 확인한 바 없는 관계이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관계다. 썸이 설레는 이유는 그 조심스러움 때문이다. 서로에게 호감은 있지만 자신의 마음을 직접 드러내기에는 아직 조심스러운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그것이 썸타는 맛일 게다.      


 이 썸타는 맛에 매혹되는 이유는 또 있다. 그건 썸의 설렘은 연애가 시작되기 전,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물론 연애가 시작되면 또 다른 기쁨들이 있기는 하지만, 썸이 주는 기쁨은 남남 사이에서 연인관계 사이로 진입하기 직전 일시적으로 맛볼 수 있는 것이기에 너무 매혹적인 것이다. 희소하고 짧은 것들은 언제나 매혹의 대상이니까. 그러니 썸을 타고 있다면, 그 설렘을 마음껏 만끽해야 한다. 무료하고 일상적인 삶의 반복에서 썸만큼 우리를 활력적이고 생동적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없으니까.


‘썸’의 해악에 관해서


“저번에 만난다는 사람 어떻게 됐어?”

“이제, 안 만나”

“왜? 마음에 든다며”

“썸타다가 그만뒀어. 지금 다른 사람이랑 썸타고 있어”     


 그렇다면 썸은 좋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연애를 위한 썸은 역설적이게도 연애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위의 대화에서처럼 어떤 사람들은 연애 관계로 돌입하지 늘 썸만타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연애에서 썸은 없는 것만 못하다. 연애를 하기 위해 썸을 타지만 정작 썸만 타고 연애는 하지 않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연애가 주는 즐거움보다 썸이 주는 설렘이 더 매혹적이기 때문일까? 그런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지 내가 겪은 경험에 따르면 사정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썸만 타고 있는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왜 썸만 타고 연애는 안하세요?”

“꼭 연애를 해야 하나요? 썸만 타도 좋아요”

“썸이라는 게 연애를 하려는 사람들의 탐색전 같은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막상 연애하면 피곤하잖아요.”


 썸만타고 연애를 안 하는 이유가 간단히 말해 ‘피곤해서’라고 했다. 도대체 뭐가 피곤하다는 말일까? 그건 아마 바쁜 일상을 쪼개 시간을 내어서 만나고 서로가 서로에게 간섭하는 등의 연애를 하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나의 정서적, 물리적 공간에 상대가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일 게다. 아니면 열정적인 연애가 남길 수밖에 없는 이별의 아픔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자기 보호 장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피곤함’이 정서적, 물리적 공간의 침범이든, 이별의 아픔에 대한 자기 보호 장치이든 간에 그건 연애를 하면 피할 수 없는 것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피곤함을 피해 연애는 하지 않고 썸만 타겠다는 건 뭔가 이상하다. 썸이든, 연애든 그건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과 결부되어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편함이 주는 기쁨이다. 그래서 사랑은 오묘하고 매혹적인 것이다.


사랑은 불편하기에 기쁨을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쯤에서 썸의 매혹에 대해서 복기해보자. 썸이 왜 기쁨을 주는 걸까? 그건 조심스러움 때문이다. 그 조심스러움은 세 가지 감정에서 연유한다고 했다. 부끄러움, 불안감, 걱정. 이것이 기쁨인가? 결코 아니다. 부끄럽고,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불편함이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이 설렘과 같은 기쁨을 주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상대가 사랑의 대상이기 그렇다. 생각해보라. 직장 상사나 선배가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고 걱정스럽게 만든다면, 그 관계를 지속하고 싶을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최대한 빨리 그 관계를 정리하고 싶을 게다.      

 하지만 썸은 사랑과 결부된 문제이기에 우리는 그 불편함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연애의 기쁨은 정확히 갖가지 불편함에서 온다.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불쑥 집으로 찾아오고, 상대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알아서 상대의 눈치를 보는 불편함은 그 상대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면 결코 감당하고 싶지 않은 불편함이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주는 대상이 사랑의 대상이라면 그 불편함은 기쁨을 준다. 그게 연애의 기쁨이다. 그러니까 썸이든, 연애든 그것이 주는 기쁨의 메커니즘은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썸만 타고 연애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

그런데 왜 썸만 타고, 연애는 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그건 연애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달이다. 연애는 분명 행복한 일인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보존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안정을 추구하는 욕구 말이다. 하지만 그 욕구는 사랑이란 감정 앞에서 언제나 좌절되고 만다. 사랑은 ‘하는’ 것이라기보다 ‘휘말려드는’ 것이기 그렇다. 아무리 자기의 삶의 패턴을 잘 지켜나가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에 빠지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일 출근하기 위해서는 10시에는 잠이 들어야 하는 규칙적인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제 아무리 규칙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안정의 욕구를 지탱했던 규칙적인 삶에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녀와 심야 영화를 보고 와인을 한잔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렇게 한 사람의 안정 욕구를 무너뜨리게 된다. 심각한 문제는 자기 보존의 욕구에 균열을 내는 그 불편함이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자발적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진짜 연애는 두려운 것이다. 자신도 어찌 할 수 없게 휘말려들어 가버리기에. 그래서 이제껏 자신을 지탱해왔던 안정 욕구에 심각한 균열을 내버리기에.


 썸만 타는 사람들은 두려운 것이다. 막상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자신의 안정 욕구에 심각한 위협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썸만 타려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는 싶지만, 이제껏 유지해왔던 자신의 모습은 바꾸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기 그렇다. 썸만 타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주는 기쁨은 불편함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썸이 잠시 설렘으로 끝나지만 연애는 그것보다 훨씬 큰 정서적 충만감을 준다. 그건 썸이 주는 불편함보다 연애가 주는 불편함 더 크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사랑이라는 동전의 앞면이 기쁨이라면 뒷면 불편함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사랑이 주는 불편함을 제거하고 기쁨을 누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며, 더 큰 불편함을 감당하면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생 뭐 있나? 매일 매일 더 큰 기쁨으로 하루 채워 가면 좋은 것 아닌가? 그게 바로 행복 아닌가? 그러니 썸만 타면서 작은 불편함으로 작은 기쁨을 느끼기보다 연애를 하면서 기꺼이 더 큰 불편함을 감당하면서 더 큰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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