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에서 잃은 것은 쪽팔림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받는 고백'보다 '하는 고백'이 더 낫다.
우선 이것부터 분명히 하자. 연애하고 싶다면, 고백하자! 우리는 ‘받는 고백’ 원하지만, ‘하는 고백’ 더 낫다. 왜냐고? 우선 평범한 우리가 고백을 받을 확률이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능동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능동적이란 말은 내가 원하는 사람과 사랑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고백을 받는 것은 수동적이다. 고백 받는 것은 황홀하지만, 그건 능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주어진 사랑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사랑일 뿐이다.
수동적으로 시작된 사랑, 이것을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오직 그 사람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어 하는 사랑은 언제나 ‘고백 하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고백을 받고’ 허락하는 연애는 그나마 괜찮은 사람이기에 하는 연애일 가능성이 크다. 진짜 사랑은 결코 수동적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진짜 사랑은 그나마 괜찮은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백 받는’ 것 보다 ‘고백 하는’ 것이 더 낫다.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다 아는데도 고백을 못하겠는데 어쩌라고?’ 거절당할까봐 두려운가? 많은 고백을 거절당해본 사람으로서 정말 잘 안다. 그것이 얼마나 쪽팔리고 두려운 일인지. 고백의 기로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거절의 쪽팔림이냐? 연애의 황홀함이냐?’ 사이에서 망설이는 것이다. 수도 없는 거절로 인해 쪽팔렸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고백하려고 노력했다. 거절의 쪽팔림보다 연애의 황홀함이 더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백해서 쪽팔리는 것도 보다, 연애해서 황홀한 것이 더 남는 장사다.
고백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도 고백은 도저히 못하겠어요’라는 생각이 드는가? 안 되는 걸 무조건 하라는 것도 폭력이다. 조금 돌아가자. 앞서 말했듯이 고백이 어려운 본질적인 이유는 거절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감정과 본래 모습을 드러내 본적이 없어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혹여 비난 받을까 상처받을까 두려워 자신의 감정과 진짜 모습을 언제나 감추며 살아왔다. 어린 시절 영화와 소설을 좋아했지만 선생과 부모는 뭐라 했었던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우리는 자신만의 감정과 본래 모습을 내보이는 것을 금기시하게 되었다.
이런 금기에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동료나 선후배에게 조차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마주서는 고백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조금 돌아가자. 우선 그 대상이 누구라도 좋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본래 모습을 정직하게 내보이는 연습을 하자.
이성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사람 대신 동료, 친구, 선후배 누구라도 좋다. “내 옆에서 떠들지 말아줄래. 난 조용하게 있는 게 좋아” “나는 섹스 하는 게 좋아” “나는 네가 좋아. 같이 점심 먹을래?” 이렇게 조금씩 자신의 감정과 본래 모습을 내보이는 연습을 하자.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용기를 내어 좋아하는 상대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고백의 어려움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의 어려움이기 때문이다.
기꺼이 상처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진짜 연애를 할 수 있다. 고백하자! 놀랍게도 고백이 성공할 확률은 언제나 50% 아닌가. 이건 고스톱에서 이길 확률보다 높다. 칼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가 혁명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연애를 이야기 하는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솔로들이 고백에서 잃은 것은 쪽팔림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솔로들이여 고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