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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서글픈 건 아픈 이별이 아닌 아프지 않은 이별이다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나는 방법 I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별은 아프다. 절절하게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해본 사람은 안다. 그 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해한다. 덜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려는 사람도, 이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조금 덜 사랑해서 이별 앞에 조금 덜 상처받으려는 발버둥, 사랑하지 않음으로 이별 자체를 겪지 않으려는 뒷걸음질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온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이별에 온 몸을 베였던 사람은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걸.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 있다. 그건 사랑하지 않음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이별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이별해도 아프지 않다. 그러니 이별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원적이고 유일한 방법은 사랑하지 않기다. 다른 방법, 없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은 늘 같이 간다. 사랑의 기쁨을 누린 만큼 이별의 슬픔을 감당해야 한다. 반대로 이별의 슬픔이 커가기에 사랑의 기쁨이 깊어간다.


 사랑의 기쁨만 누리고 이별의 슬픔은 피하고 싶어 등장한 것이 인스턴트 사랑이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인스턴트 사랑은 기쁨이 아니라 더 큰 공허와 외로움만을 남긴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은 늘 같이 간다’는 연애의 진실에 타협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유약한 것이 인간이라 슬픔이 두려운 것을 어쩌랴? 그러니 이별의 슬픔을 줄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해보자.


이별 후의 아픔을 대견하게 생각하자.


온 힘을 다한 사랑의 끝에 찾아온 이별의 아픔, 그것을 어떻게 줄인 것인가? 답이 없을 것 같은 질문에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별의 슬픔과 아픔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라. 정말 대견한 일이다. 요즘 시대의 연애가 어떤가?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머리로는 계산을 하고, 덜 상처 받기 위해서 덜 사랑하는 인스턴트 연애가 판을 치는 세상 아닌가? 물론 그런 연애 끝의 이별 역시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아픔은 당장 다음 날 친구들과 쇼핑을 하거나 웃고 떠들며 술 한 잔 마실 때면 언제 아팠냐는 듯이 사라지는 아픔이다. 작전 성공이다. 덜 상처 받으려고 덜 사랑한 작전. 반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은 그리 가볍지 않다. 온 힘을 다한 사랑이 남긴 이별의 아픔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때문에 한 동안 이불 밖으로도 나오지 못할 정도다. 너무 사랑했기에 그리 아픈 것이다. 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일생에서 식음을 전폐할 정도의 이별을 해보았다는 것, 인생에서 그 더 소중한 일도 없다.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다. 하지만 정말 서글픈 건 아픈 이별이 아니다. 아프지 않은 이별이다. 이별 후에 아프지 않다면 그간 해왔던 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연인이라 믿었던 사람과 보냈던 시간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보다 더 서글픈 일도 많지 않다. 잠시는 이별이 아프지 않기에 다행스럽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이내 알게 될 게다. 자신은 온 힘을 다해 누구를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을.


 아픈 이별을 감당하고 있다면 먼저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자. 이별은 너무 아프지만 그 아픔은 바로 자신이 온 몸을 던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근사한 사람임을 증명 해주는 표식이니까. 요즘 같이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세상에 이런 근사한 사람은 드물다. 이별에 아파하고 있다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아파하는 자신에게 이리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조금 아프면 어때. 내가 근사한 사람이라서 이리 아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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