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불행’이 되는 메커니즘
가끔 우리에게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사고’라는 불청객. 이 불청객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지요. 해고, 부도, 이별, 이혼, 부상, 질병 등등. ‘사고’라는 불청객은 이처럼 다양한 얼굴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사고’이지요. 하지만 가끔 주변을 돌아보면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건 많은 ‘사고’에도 불구하고 ‘불행’하지 않은 사람들을 볼 때 그렇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하다는, 극심한 화상을 입고도 삶의 긍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죽을 때까지 갚아도 다 갚지 못할, 몇 십억 원의 빚을 지고도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제가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래서 불행의 문턱 앞에서 서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궁금해졌습니다. ‘사고→불행’으로 쉽게 연결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사고’와 ‘불행’ 사이에는 ‘불안’이 있습니다. 도식으로 설명하자면, ‘사고→불안→불행’입니다. ‘사고’가 찾아와 ‘불안’해지면 ‘불행’해지는 것이지요. 이론적으로는 알겠습니다. 사고를 당해도 불안해하지 않으면 불행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분명 그렇습니다. 전신 화상을 입고도 ‘불행’하지 않은 건 ‘불안’하지 않아서이고, 몇 십억 원의 빚을 지고도 ‘불행’하지 않은 건 ‘불안’하지 않아서입니다.
이론은 때론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합니다. ‘사고’가 났는데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해고당했는데, 부도가 났는데, 이별·이혼했는데, 다치고 병에 걸렸는데,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고’는 너무나 쉽게 우리를 ‘불안’으로 밀어 넣기에 ‘불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요. ‘사고’를 당했는데, ‘불행’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시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나요?” 이것이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고’ 없는 삶은 없기 때문이지요.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사고’라는 불청객이 찾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건, ‘사고’에도 불구하고 ‘불안’하지 않을 방법을 찾는 겁니다.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요.
‘사고’와 ‘불안’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왜 우리는 ‘사고’를 당하면 그리도 쉽게 ‘불안’으로 빠져드는 걸까요? ‘사고’와 ‘불안’ 사이에는 ‘무기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고를 당한 것 자체는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정말 심각한 건, 사고를 당하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는 겁니다. 아니, “이걸 해서 뭐해. 이미 다 틀려 버렸는걸”이라고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잠식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무기력에 잡아먹히는 것이지요. 무기력에 잠식 당할때, 우리는 여지없이 불안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옥 같은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걸겁니다.
‘사고’가 ‘불행’이 되는 메커니즘은 이렇습니다. ‘사고→무기력→불안→불행’ 사고를 당했지만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면 어디서 개입을 해야 할까요? ‘사고’와 ‘불안’ 사이의 ‘무기력’입니다. 사고가 닥쳤을 때, 내면에서 스물 스물 올라오는 목소리, “이미 다 틀렸어. 뭘 해도 다 의미 없는 짓이야”라는 그 내면의 목소리에 당당하게 맞서야 합니다. 그 내면의 목소리를 ‘나’를 집어 삼키려는 악랄한 '적'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 목소리에 맞서 이렇게 말해야합니다. “그럼 아무 것도 안하면 어쩔 건데!” 그리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무기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때 알게 됩니다. ‘사고’는 났지만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요. ‘사고’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무기력’입니다. 정확히 ‘무기력’으로 이끄는 우리 자신의 내면입니다. 저는 그렇게 피할 수 없는 ‘사고’가 ‘불안’으로 또 ‘불행’으로 가는 걸 악착같이 막아서고 있습니다. 사고를 당하셨나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냥 하면 됩니다.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 그렇게 철학을 하며 알게 된 삶의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삶의 문제는 단순하다, 다만 우리가 단순해지기 어려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