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아픈 일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아름다운 채색하려는 이들이 있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채색하려는 이들이 있다. 연인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채색하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엇인가?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자본주의적 소유욕의 결합이다. 자식은 또 ‘다른 나’이기에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은 ‘나의’ 새끼이기에 사랑하는 것 아닌가. 그것을 대체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지독히 자신만을 보살피려는 것. 악착같이 자기 것을 지키려는 탐욕을 사랑이라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배우자 혹은 연인에 대한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진정 사랑이었을 때는 그 사랑을 아름답게 채색하지 않는다. 애써 배우자, 연인의 장점을 날조하지 않는다. 그 사랑 자체로 이미 빛나며 상대는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사랑이 끝나버렸을 때, 사랑을 날조하고 상대의 장점을 날조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어” “그래도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야” 그 기만적인 위미僞美와 거짓말을 사랑이라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빠는 너를 위해 살 거야!” 부모의 사랑이 나르시시즘이며 소유욕이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 “당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배우자의 사랑이 사실은 사랑-없음(무관심)의 결과임을 직면하게 될 때. “우리 미래를 위해 돈을 아끼는 거야” 연인의 사랑이 나보다 돈에 더 쏠려 있다는 사실에 직면할 때. 그 모든 있는 그대로를 보는 일이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 그 아픈 일을 왜 해야 하는 할까? 의미 없는 질문이다. 파란 약을 먹어 거짓 세계의 즐거움을 누리던지, 파란 약을 먹어 진짜 세계의 고통을 누리던지. 그것은 각자의 선택인 까닭이다. 또한 빨간 약을 먹어본 이들만이 아는 깨달음을, 거짓 세계에 사는 이들에게 설명할 길이 없는 까닭이다. 진짜 세계의 고통이 바로 진정한 즐거움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깨달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