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를 하고 나서 몸살이나 두통에 시달린 적이 종종 있었다. 멋모르고 사람들을 만나던 시절, 그저 컨디션이 나빠서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그 몸살과 두통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섹스는 몸만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다. 몸을 매개로 마음마저 나누는 일이다. 그것이었다. 상대가 우울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혹은 서로가 둘의 관계를 온전히 긍정하지 못할 때 그런 몸살이나 두통이 찾아왔다. 몸을 매개로 마음을 나누는 과정에서 상대의(혹은 관계의) 우울과 걱정, 불안이 자신에게 되돌아 왔기에 몸살이나 두통이 찾아왔던 게다. 그 몸살이나 두통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비례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더 사랑하면 더 많은 마음이 매개되니까 말이다.
어렸던 어느 시절, 사랑은 즐거운 일이라고 믿었다. 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가. 사랑은 고되게 짝이 없는 일이다. 사랑은 고통을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단 이성적 관계만이 그런가? 사고로, 아이의 손가락의 첫째 마디가 반 즈음 잘려 나간 일이 있었다. 손톱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손가락을 보면서 차라리 내 손가락이 잘려나가기를 바랐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이토록 고된 일이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동시에 유사사랑을 사랑으로 포장하려는 이유일 테다. 사랑은 고통은 나누어야 하는 고된 일이니까.
그렇다면, 왜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만이 우리를 살아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되묻고 싶을 테다. 사랑이 고통을 준다면 사랑은 우리를 죽게 만드는 건 아닌가? 아니다. 고통을 느낄 때 만 우리는 살아 있다.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때 꼬집고 뺨을 때리는 이유도 그래서다. 살아 있을 때만 고통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다. 삶의 본질은 고통이다. 정말이다. 삶은 그 시작부터 고통 아닌던가. 갓 태어난 아이가 왜 우는지 생각해보라. 아늑한 자궁으로부터 나와 고통스러운 빛과 폐호흡을 감당해야 한다. 그 후로, 그보다 더한 고통이 끊임없이 이어지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는 즐거움은 무엇인가? 고통의 그림자다. 낡은 비유가 아니다. 그늘의 즐거움은 바로 고통스러운 뙤약볕의 그림자 아닌가. 몸과 마음을 나누는 사랑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사랑의 고통이 주는 그림자일 뿐이다. 섹스의 몸살과 두통 때문에 섹스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고통스러운 섹스의 몸살과 두통을 느껴본 적이 없다면, 진정한 섹스의 즐거움 또한 느껴보지 못했다는 의미기도 하다.
잊지 말자. 우리를 죽이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공허다. 공허는 사랑 없음이다. 고통을 피하려는 이가 도달하게 되는 곳은 공허의 땅이다. 허무의 땅. 무의미의 땅. 몸살과 두통이 없는 땅. 이 말라비틀어진 땅에서 우리는 조금씩 죽어간다. 기꺼이 고통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땅이다. 몸살과 두통이 끊이지 않는 땅이 비옥한 땅이다. 우리를 더 생기있고 윤기 넘치게 해줄 비옥한 땅. 누가 뭐래도 사랑은 아름답다. 그것은 사랑이 즐거운 일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슬픔 속에 있는 법이다. 나는 기꺼이 고통을 껴않으며 살 테다. 사랑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