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손원평
부산 토박이었던 엄마는 내가 표준말을 쓰기를 바랐다. 억세고 강한 억양이 싫었던 엄마는 아들만큼은 표준어를 사용하여 조용조용한 말투를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극단적으로 집에서 사투리를 쓰지 않기로 마음먹으셨다고 한다. TV에서 봤던 것처럼 부산 사람이 이상한 억양으로 표준어를 흉내 내는 걸 봐온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 엄마 역시 그런 모습이었을 거라 생각하면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표준어를 구사하기 위해서 엄마가 선택한 방법 하나는 책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동화책을 말이다. 동화책에서는 사투리가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이 표준어로 구성되어 있기에 무려 하루에 50권 정도의 책을 읽어주시곤 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내가 실제로 동화책에 있는 글들로만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치원을 다니거나 밖에 데리고 나가면 엄마의 친구들이나 동네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말을 시키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다.
“아가 서울 안 갑네? 서울에서 왔는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손사례를 치며 집에서 그냥 책만 많이 읽어줄 뿐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커서 꼭 아나운서나 앵커를 시키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엄마의 이런 바람은 정말 순식간에 무너졌다. 정확히는 딱 하루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하루 정도나 지났을 무렵부터 갑작스레 억양이 섞인 말투를 구사하더니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부산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지금에서야 엄마는 그때의 사실을 털어놓았는데.
“아니, 8년을 표준말 쓰면서 키웠는데 이 삼일 만에 갑자기 너희 아빠랑 똑같은 말투로 돌아온 거라. 애들이 아무리 배우는 게 빠르다했지만은 내는 이렇게까지 빠를줄은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8년여간의 노력이 어떻게 그리 짧은 시간 만에 깨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환경의 영향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8살까지는 유치원을 다니긴 했지만, 3-4시간 밖에는 다니지 않았고, 그 외의 시간은 모두 엄마와 보냈다. 그렇기에 내가 봤던 세상은 유치원이 아니라 엄마라는 세계였고, 엄마가 읽어줬던 그림책과 같이 봤던 만화영화. 같이 불렀던 노래들이 나에게는 모두 커다란 영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게 되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엄마 한 명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명의 동갑내기 친구들과 또 다른 어른이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내가 보게 되는 세계는 크게 뒤흔들린 것이다. 더군다나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은퇴를 앞둔 부산 토박이 남자 선생님이었던 것도 한 몫했으리라. 하루 종일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둘러 쌓인 채 얘기를 하고 얘기를 듣고 있으니 엄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은 아직도 내가 표준말을 쓰고 있다면 엄마의 바람대로 앵커나 아나운서 혹은 성우에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곤이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단순하고 투명했다. 나 같은 바보조차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세상이 잔인한 곳이기 때문에 더 강해져야 한다고, 그 애는 자주 말했다. 그게 곤이가 인생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아몬드> - 손원평
반면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환경이라는 게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이토록 엄청나다면, 그때 내가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고 표준어를 계속 썼다면 어땠을지에 관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지만, 자신들과 억양이 다르다고, 왜 부산사람인데 사투리를 쓰지 않냐며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 중, 고를 다니며 정말 별 것 아닌 것에도 괴롭힘을 받거나 놀림을 받는 친구들도 많이 봐왔었고, 그것 때문에 자신만의 개성을 지우고 평범해지고 싶어 하는 친구들도 봐왔었다. 사람은 본인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기에 전부 획일화되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가끔 환경은, 그리고 사회는 우리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며 개성을 지우고 평범을 강요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손원평 작가님의 소설인 <아몬드>에서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정상적인 게 어떤 거니? 남들과 비슷한 것」
<아몬드> - 손원평
자유롭고, 활발한 것을 정신 사납고 불안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을 사회화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매 순간 고민하며 살아간다. 개성 넘쳤던 어린 시절에서 조금씩 개성을 잃어버리며 보통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평범을 원하며 가장 원했던 것은 아마도 행복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잊고 있던 개성이야말로 어린 시절 우리를 가장 즐겁게 만들어줬던 행복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