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로라 레빈스 모랄레스가 쓴 <망명과 자긍심> 추천 글에 "개인이 주권을 추구하는 일이 어떻게 그토록 많은 상실을 짊어지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문장을 보고 단번에 느낌이 왔다. 아, 이 사람에게는 서구 철학자들이 흔히 'dislocation'이라고 말하는 '장소로부터의 이탈/해리'의 경험이 있겠구나.
이 사람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아우로라 레빈스 모랄레스 Aurora Levins Morales. 1954년생, 서로 다른 이주 배경을 가진 부모를 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시인이며 작가. 1970년대부터 반전 운동, 성차별 및 인종차별 반대 운동, 환경 운동, 장애 인권 운동 등의 활동가 이력을 갖고 있다. 아동기에 학교를 통해 접근한 아동 포르노 업자들 및 인신매매단에 의해 수년 동안 성폭력과 고문을 당했다. 환경 파괴 및 교통사고 등으로 인해 다양한 만성 질환과 장애를 갖고 살아가고 있으며, 환경 문제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경험이 있다.
짐작해 보건대, 이런 삶의 이력을 가진 아우로라 레빈스 모랄레스가 말하는 '상실'이란, 삶의 기반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분리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상실'을 dislocation 개념으로 연결하여 사고해 보면, 그가 경험한 '장소로부터의 이탈/해리'에서 '장소'란 인간의 존재론적 집인 '몸'과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구체적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갖고 있는 다중적 정체성, 그가 살았던 다양한 공간들, 그가 경험했던 복잡한 몸과 장소의 상실 양상 등을 고려해 볼 때, 그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하는 '지식'이란 흔히 교차성 개념이 제시하는 복잡성, 중층성뿐만 아니라 모순, 모호성, 양가성 등의 역설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다.
흔히 페미니즘의 '교차성' 개념은 다중 정체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 인종, 성, 이성애 중심주의, 계급 등 주요한 억압 체계가 맞물려있는 현실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범주라는 점 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교차성 개념을 살아있는 사람이 경험하는 복잡하고 중층적이고 모순적인 '상실'의 경험을 이해하는 분석 범주로 접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페미니즘의 위대함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역설'(Joan Scott)에 있었다는 점을.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신은 그렇게 많이 부러지고 그렇게 많이 잃고선 어떻게 살아가나요?" 나는 대답했다. "부서진 것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온전한 이야기예요."
- 아우로라 레빈스 모랄레스, <망명과 자긍심>(일라이 클레어 저, 전혜은, 제이 역, 현실문화) 추천의 글 중에서 26쪽.
아우로라 레빈스 모랄레스와 <망명과 자긍심>의 작가 일라이 클레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복잡하고 중층적이고 모순적인 몸과 장소의 상실을 살아온 작가들이다. 그리고 둘 다 "부러진 채로 온전한 우리의 자아가 힘겹게 싸우고 있는 이 문제들"로 독자들을 초대하여, 모순과 상실이 발생한 그 자리에서 세상에 필요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작가들이다. 낯설고 매력적인 언어로 '몸과 장소의 상실에서 솟아나는 온전한 이야기',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몸과 마음이 풍요롭게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아우로라 레빈스 모랄레스의 삶과 글을 접하고 나니, <망명과 자긍심>을 읽으며 느꼈던 기분,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