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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ked Jun 17. 2022

5. 마음의 깊이

- 우리는 깨어있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은 내가 ‘나’라는 의식도 없이 삶을 영위해 나간다. 일상적인 삶의 패턴을 좇아 살아가게 된다. 늘 하는 방식으로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한다. 하루 종일 일에 파묻혀 살다가 틈틈이 직장동료와의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하며 세상을 비판하기도 하고, 문득 어린 시절의 친구가 그리워 전화통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 퇴근 시간이 되면 대중교통에 몸을 싣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TV나 유튜브를 보거나 가족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조금 나누다가 잠이 든다.


분명 하루 종일 살아왔지만, 하루 종일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며 살지만 단편적인 기억만이 존재할 뿐 그냥 하루를 보내게 된다. 정작 기억이 나는 것은 몇 개 없다. 해야 할 일과 몇 개의 약속 정도이다. 무엇을 하고 하루를 보낸 것인가? 웃고 즐기고 비판하면서 보낸 하루에 얼마나 나는 깨어 있는가? 늘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감정과 늘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생각들 속에 하루가 지나간다. 이런 일상적인 삶은 매일 반복되어 하루하루가 비슷해지면 세월은 의미없이 흘러간다.


그런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사람들은 이렇게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문득문득 느낀다. 관성적인 삶을 산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관성적인 삶이란, 기차를 한번 타게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적지까지 가는 것 처럼, 내 삶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정한 방향과 속도로 어딘가로 나아간다는 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향과 속도는 누가 어떻게 정한 것인가? 일상의 나는 내 운명의 방향과 속도를 어떻게 조절하고 있는가? 운명의 기차에 나 자신을 맡기고 있다는 것인가?  맡겨진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옛사람들은 ‘나’를 세 가지로 나눴다.  그것은 현재의식, 잠재의식, 그리고 무의식이다.


현재의식


현재의식은 내가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의식을 의미한다.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고 감정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며 생각을 통해 세상을 해석한다. 더불어 욕망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실현해 나간다. 느끼면서 생각하고 성취하며 그렇게 존재한다.


보통의 나는 자신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가 나의 주재자라고 생각한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감촉을 느끼는 감각작용 속에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개인마다 차이가 존재하는 감각작용으로 인식하는 세계를 통해 각각의 인간은 자신만의 감정과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한다. 이런 존재성이 확장되고 과장되어 스스로를 속이는 상태에 빠지면 내 인생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현재 내 마음만 바꾸면 언제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의식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하고자 한다고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우리의 의지나 판단과 관계없이 나 자신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다. 현재의 삶에 대한 핑계로 언제나 이상을 꿈꾸지만, 이상이라는 핑계 속에 현재의 나를 속이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또 다른 내면은 어디에 숨겨져 있다. 그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잠재의식이다.


잠재의식


잠재의식은 우리가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때 보이는 의식을 의미한다. 꿈을 꾸면 분명히 내가 존재하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꿈속의 나는 내 스스로 제어가 불가능하다. 꿈속에서의 의식은 현재의식에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가 보통 현재의식에서 보고 듣는 감각과 느끼는 감정, 그리고 일어나는 생각과 일으킨 생각들이 차곡차곡 잠재의식에 쌓이게 된다. 불특정한 방식으로 저장되어 불특정한 방식으로 기억에서 추출된다.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기억을 떠 올릴 때가 있다. 지나가다가 식당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에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떠올리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첫사랑이 생각나기도 하며, 헤어진 연인과 비슷한 사람이 지나갈 땐 가슴이 덜컹 내려앉기도 한다. 기억들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저장되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튀어나온다.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만들어 온 의식의 저장소가 바로 잠재의식이다.


무의식


이런 잠재의식의 세계를 지나, 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면 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무의식은 잠을 잘 때 꿈조차 꾸지 않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의식을 말한다. 우리가 깊은 숙면에 들어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이 꺼져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은 숨을 쉬게 하고 손톱을 자라게 하고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는 의식이다. 분명 우리의 몸인데 우리가 의식하면서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자라게 하지 않고, 심장과 같은 장기들이 알아서 움직이도록 하는 의식이다. 그 누구도 심장을 의식으로 멈출 수 없고 손톱을 의식적으로 자라게 하지 못한다. 만약 의식적으로 이러한 작용을 하게 한다면, 사람은 여기에만 신경을 쓰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무의식에는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생명유지 의식이 존재한다. 


잠재의식인 꿈속에서는 최소한의 ‘꿈을 꾸는 자’가 존재하지만, 꿈도 없는 무의식에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나’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의식이 있다. 타고난 신체와 의식구조를 만들어주는 토양이 여기에 있다.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나’라고 생각하는 ‘나’의 기본적인 토대가 여기에 저장되어 있다.


 - 불교에서는 여기 무의식에 업(業)이 저장되어 있다고 본다. 업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전생부터 현재 태어나 만들어진 업이 모두 여기, 무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고 본다.-


현재의식의 크기는 잠재의식의 수만 분의 일에 불과하고, 잠재의식은 무의식의 수천 분의 일, 수만 분의 일에 불과하다. 각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심연의 무의식은 우주만큼 광활하다. ‘나’라는 존재는 이런 현재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계가 합쳐진 ‘나’이다. 이런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존재가 바로 내가 내 마음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유이다. 현재의 의지와 판단에 상관없이 이뤄지는 의식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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