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요술 조약돌》: 금보다 더 값진 시(詩)

by 김환희

《시인과 요술 조약돌》(팀 마이어스 글/한성옥 그림, 김서정 옮김, 2004)일본의 대표적인 17세기 시인 바쇼와 여우가 친구가 된 과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옛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쓴 것이지만 일본에서 전승되어 온 민간설화가 아니라 팀 마이어스가 상상력을 발휘해서 쓴 창작옛이야기이다. 이 책은 《시인과 여우》의 후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전편과 연계 지어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 미국인 작가가 글을 쓰고 한국인 화가가 그림을 그린 일본 시인에 관한 옛이야기니깐 그야말로 국제적인 협동의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문화권의 작가들이 함께 작업할 경우 자칫하면 졸작이 나오기 쉬운데 이 책은 글과 그림이 잘 어우러져서 읽는 이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미국 일러스트레이터 협회>가 주는 상을 탄 한성옥이 일본 문화와 자연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그림도 좋고, 외국 땅의 옛 시인을 향한 마이어스의 사랑과 존경도 인상적이다. 바쇼가 생전에 여우와 친구가 되어 버찌와 하이쿠(17음절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단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지냈을 것이라고 상상한 작가의 동심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인 바쇼는 후카 강 근처로 이사 왔는데 집 마당에 벚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그래서 바쇼는 근방의 여우와 버찌를 나누어 먹는다. 어느 날 여우 하나가 바쇼와 버찌를 나누어 먹는 것이 싫어서 잔꾀를 부린다. 여우는 요술을 부려서 강가의 조약돌 세 개를 금돈으로 바꾼 후 중으로 변신해 바쇼의 오두막에 찾아간다. 중으로 변한 여우는 바쇼에게 금돈을 줄 테니 버찌를 여우들에게 모두 양도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한다. 살림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바쇼는 여우의 요구에 응한다. 하지만 아침에 깨어보니 금돈은 요술이 풀려 조약돌로 바뀌어 있었다. 자신이 속은 것을 안 바쇼는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조약돌이 지닌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에 이끌려서 “돌은 가난을 아랑곳 않고 강만 사랑 하누나”라는 하이쿠를 짓는다. 바쇼의 행동을 몰래 엿보던 여우는 바쇼가 속은 것을 알고도 분해하기는커녕 행복한 마음으로 시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여우는 바쇼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 어느 절의 석등 밑에 묻어 둔 진짜 금돈 세 냥을 꺼내 들고 바쇼를 찾아가서 계약을 무효로 하자고 한다. 바쇼는 한 번 한 계약을 무효화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그러자 여우는 계약서에 적힌 대로 진짜 금돈을 주겠다고 말한다. 바쇼는 버찌 값은 이미 받았으니깐 자신에게 동정을 베풀지 말라고 말한다. 여우는 다시 꾀를 내어서 금돈 세 냥을 조약돌 세 개로 변하게 한 후에 바쇼를 찾아 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이니 받아달라고 간청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 바쇼가 깨어나 보니 간 밤에 상 위에 놓아두었던 조약돌이 요술이 풀려 금돈 세 냥으로 변해 있었다. 바쇼는 자신이 또다시 여우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웃음을 터뜨린다. 여우도 시인되어서 “더불어 먹는 버찌는 혼자보다 더욱 달콤해”라는 하이쿠를 짓는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시인과 요술 조약돌》은 자연과 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지를 잘 표현한다. 가난한 시인 바쇼는 처음에는 여우에게 속은 것을 알고 화가 났지만 욕심쟁이 여우 덕분에 강변에 놓여 있을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평범한 조약돌이 지닌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바쇼는 자신이 비록 사기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 체험이 황금보다 더 귀한 한 줄의 시를 쓰게 해 주었기 때문에 그 거래에 만족해한다. 마이어스의 글에 묘사된 바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쓰든 달든 그 삶을 담담한 자세로 받아들이면서 보잘것없는 사물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는 그런 도인 같은 존재이다. 한성옥의 그림도 그런 바쇼의 모습을 잘 형상화해 보여 준다. 화가가 그린 바쇼의 모습에서 착하고 천진무구한 시인의 인품을 느낄 수가 있다. 또 바쇼의 오두막에 놓인 조촐한 살림살이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잘 말해 준다. 책 몇 권, 차 주전자, 꽃병, 항아리, 그리고 상 하나 정도가 살림살이의 전부인 듯싶은 바쇼의 오두막은 그야말로 수도승의 암자이다. 마당에 두 마리의 닭과 병아리 몇 마리를 키우고는 있지만 먹이로 키우는 것 같지는 않고 외로워서 벗 삼아 키우는 것으로 보인다. 오두막 주변에는 자연과 여우들이 있을 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월든 호숫가에 손수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미국 시인 소로우와 강원도 산골의 초가집에 사는 법정 스님의 소박한 삶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삶에 대해 소도라는 하이쿠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은 적이 있다. “이 봄날, 내 오두막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있다.”¹

금돈찾는여우.jpg ⟪시인과 요술 조약돌⟫ 팀 마이어스 글/한성옥 그림, 김서정 옮김, 보림, 2004)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바쇼나 소로우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처럼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가 만약 《시인과 요술 조약돌》속의 바쇼처럼 겨울철을 어떻게 보내야 될지 모를 정도로 막막한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 사기까지 당했다면 바쇼처럼 돈보다 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마이어스가 바쇼를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다 보니 너무 비현실적으로 그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바쇼가 실제로 쓴 하이쿠를 읽어보면 그가 마이어스가 상상하는 그러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바쇼는 삶을 번개처럼 찰나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봄의 첫날에 가을의 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삶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삶을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바쇼에게 금돈 세 냥이 조약돌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닐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 질 금돈 세 냥보다는 시간의 흐름을 이길 수 있는 아름다운 한 줄의 시를 쓰게 해 준 조약돌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시인과 요술 조약돌》이 전하는 또 다른 메시지는 예술의 힘, 즉 예술이 우리의 삶과 심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다. 가난하게 살지만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아름다운 시를 더 소중히 생각하는 바쇼의 모습은 탐욕스러운 여우를 변화시킨다. 바쇼의 착한 인품에 감동한 여우는 자신의 이익에 대한 집착과 거짓에서 벗어나 타인과 더불어 사는 기쁨, 나눔의 미덕을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여우는 어느새 바쇼를 닮은 시인이 된다. 마이어스는 바쇼의 모습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한 줄의 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 지를 보여주고, 여우의 변모를 통해 시 또는 예술이 다양한 속성과 잠재력을 지닌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 것 같다. 또 마이어스는 자신이 창작한, 여우와 바쇼가 지은 두 편의 하이쿠를 통해 어린이에게 시를 쓰는 즐거움을 전해 주고 그들을 시의 세계로 조금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 한 것 같다. 즉 시(詩)란 특별한 사람들이 체험한 특별한 사건을 세련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평범한 삶과 평범한 사물 속에서 새롭게 발견 한 아름다움을 단순·소박한 언어로 표현한 것임을 말하려 한 듯싶다.

이와 같이《시인과 요술 조약돌》은 어른과 어린이 모두에게 즐거움과 교훈을 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마무리 짓기 전에 그림과 글에서 느껴지는 몇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하겠다. 내가 알기로는 벚나무는 보통 5월에서 7월 사이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버찌를 먹을 수 있는 계절은 초여름이다. 그런데 그림의 배경을 보면 나무 잎이 붉은 단풍으로 변하고 뜰에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것이 확연히 가을이다. 버찌가 익는 계절과 그림의 배경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다. 만약에 바쇼와 여우가 버찌를 나누어 먹은 시기와 그들이 계약을 맺은 시기가 서로 다른 것이라면 작가는 책 속에 그 시간적인 간극을 명시를 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 대단원을 구성하는 그림에서도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그림은 바쇼가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약간 열고 문 옆 벽에 붙어 있는 여우의 쪽지를 보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그림 속의 쪽지에는 일본어로 “더불어 먹는 버찌는 혼자보다 더욱 달콤해”로 쓰여 있는데, 글에서는 쪽지에 “선생님 처음에 드린 조약돌 덕분에 선생님이 시를 쓰셨듯이, 이 일 덕분에 저도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이 쓰인 것처럼 되어 있다. 즉, 그림 속의 쪽지에 쓰인 내용과 글 속의 쪽지에 쓰인 내용이 서로 다르다.

여우.jpg ⟪시인과 조약돌⟫ (팀 마이어스 글/한성옥 그림, 보림, 2004)

아쉬운 점을 또 하나 더 언급하자면 글에 군더더기가 더러 있다. 압축과 생략의 묘미는 그림책의 미덕이면서 바쇼의 하이쿠가 지닌 매력이다. 바쇼의 예술 정신에 충실하게 글을 쓰기 위해서는 되도록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생략해야 한다. 그런데 마이어스의 글에는 없어도 상관없는 구절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여우가 바쇼에게 “저는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으셨군요! 앞으로 금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사를 굳이 책 속에 삽입할 필요는 없었다. 그 대사가 없어도 독자들이 여우의 마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글과 그림은 많은 정보를 준다. 또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대단원에 삽입된 여우의 글, 즉 여우가 시를 쓰게 되었다는 구절도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구절이 책에 쓰여 있지 않아도 독자는 벽에 붙은 하이쿠만으로도 여우가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이어스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치우쳐서 그림책이 지닌 예술적인 가치를 소홀히 취급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그림책이 높은 예술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글이 시(詩)에 가깝게 정제되고 압축되어야만 한다. 어린이 독자들이 메시지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단정 짓고 그림책의 글에 부연설명을 늘어놓으면 그림책이 지닌 매력과 예술성이 손상된다. 설령 아이들이 작가의 메시지를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아이들이 이야기의 의미를 나름대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여백의 묘미를 살릴 필요가 있다.


¹ 이 글에서 인용한 하이쿠들은 모두《한 줄도 너무 길다》(류시화 엮음, 이레, 2000년)에서 가져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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