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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마 Nov 29. 2022

야요이 문명을 일군 한반도 도래인은 누구?

규슈에 새겨진 한국사 8

 https://brunch.co.kr/@storybarista/36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일본의 기나긴 신석기시대를 끝내게 하고 문명의 서광을 비춰준 한반도 도래인은 어디에서 간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왜 정든 고향 땅을 떠나 험난한 바다를 건넜을까요?


그들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한반도의 남쪽 사람들이었습니다. 8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한반도 남쪽에는 이미 B.C 3C 이래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다수의 정치 집단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B.C 194년 이곳에 생긴 급격한 변화를 『삼국지(三國志)』의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과 『삼국유사(三國留史)』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의 왕인 준(準)이 궁중 사람들과 좌우 신하들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의 땅에 이르렀다. 그 땅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준왕이 세운 나라가 마한이라고 했는데, 학계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으며, 대체로 마한이 준왕이 내려오기 전부터 존재한 B.C 3C(또는 B.C 1C) ~  A.D 3C 경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에 존재한 54개의 소국 연맹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한에 대한 몇 가지 이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은 이 시기 북방에서 온 이주민들로 인해 한반도 남쪽 지방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위만이 전해준 철기 문화가 준왕 집단에 의해 남쪽으로 유입된 것과 관련 있습니다. 이로부터 100년도 채 안된  B.C 108년에 이르러 위만조선마저 중국 한(漢)나라에 망하면서 많은 유민이 생겨납니다. 이들이 대거 한강 이남으로 이주하게 되고 철기문화는 한반도 남부로 급속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옹관묘가 마한영역, 그중에서도 영산강유역에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국립나주박물관(왼쪽)과 익산 마한박물관(오른쪽)에 전시된 옹관입니다.
나주 복암리고분군 전시관의 아파트형 고분(옹관을 비롯한 총41기 무덤) 실물 모형과 반남고분군에서 출토된 나주박물관의 스타, 마한 지배층의 화려한 금동관(국보)입니다.


한강, 금강,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벼농사가 가능한 풍요로운 들판을 가지고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던 마한인들은 위만조선의 유민과 문화가 유입되고 철기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부터 그 지배력이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B.C 18년경 한강 유역에서 일어난 북방계인 백제국의 견제와 압박을 받으며 점차로 마한 소국 간의 결속은 약해지고 점차로 백제에 통합되어 나가게 되지요. 이런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한반도의 남부 사람들, 즉 마한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입니다. 마한인들은 해류를 타고 어렵지 않게 일본 규슈까지 갈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여러분은 전래동화 '연오랑과 세오녀'를 기억하시나요?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가 움직여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지요. 이를 본 그 나라 사람들이 "이 사람은 매우 특별하다." 하고는 연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세오는 남편을 찾아 나섰다가 벗어놓은 남편의 신발을 발견하고는 연오처럼 바위를 타고 일본에 도착합니다. 부부가 다시 만나 기뻐하며 연오가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허무맹랑합니다. 한반도 사람이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니요? 그런데 말입니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이야기는 소설책이 아닌 역사서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설화입니다. 비록 『삼국유사』에는 신라 아달라왕 4년(157)에 동해 바닷가에서 부부가 일본으로 가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바위를 타고 한반도에서 해류를 따라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일본에 도착했다는 부분입니다. 현대인의 예상과는 달리 한반도 남쪽에서 일본으로 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58km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걷는 포항 호미반도 해안 둘레길에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들어섰습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을 비롯한 일본 규슈의 다양한 야요이인의 흔적은 바로 그렇게 진취적으로 삶을 개척한 한반도 남쪽 사람들, 그러니까 수많은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다를 건너 정착한 곳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일본 열도의 원주민인 조몬인과 어울려 살아니다. 한반도로부터의 이주민들(야요이인)은 벼농사의 높은 생산성으로 인해 조몬인에 비해 훨씬 빠르게 인구가 늘어나 조몬인을 압도니다. 벼농사와 청동기를 기반으로 하는 야요이인과 문명은 3C 이후에는 규슈에서 혼슈 북부에 이르는 일본 전 지역에 전파되기에 이릅니다. 이들이 바로 현대의 일본인입니다.    



각종 사료와 고고학적 증거들은 지난 글에서 소개한  '일본인의 뿌리' 세 번째 설인 B.C 4C경부터 벼농사와 함께 금속기(청동기, 철기)를 전한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 야요이 문명을 일군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설에 더욱 힘을 실어줍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를 비롯한 서양 학자와 한국 학자들이 주장하는 설이지요.

    

그러나 요시노가리 유적과 유물이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요시노가리의 형님 격인 송국리 유적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안타깝게도 매우 미미합니다. 2007년에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사가현 교육위원회가 공동으로 기획한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국립중앙박물관), <요시노가리 유적과 고대 한반도- 2,000년의 시공을 넘어>(일본 사가현립미술관)의 전시가 양국에서 대규모로 개최되면서 한 때 일반의 관심을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도 부여 송국리가 알려지면서 송국리 자료관 방명록에는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일본 관람객의 흔적도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송국리 유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과정은 간단치 않습니다. 흔한 홈페이지도 없고 부여군청, 국립 부여박물관 등으로 연락을 취한 뒤에야 이러저러한 관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B.C 850 ~ 400년까지 형성된 청동기 대규모 마을 유적인 부여 송국리에서는 집터 110여 기, 82기의 구덩이, 돌널무덤 4기, 움무덤 7기, 독무덤 7기가 확인되었고 지상식 건물과 목주열, 울책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송국리형 토기로 명명되는 토기, 각종 농사도구, 사냥과 수렵에 사용된 각종 도구 등 1만 5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1975년부터 지금까지 4개 기관에 의한 22차례에 걸친 발굴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에 이렇다 할 유구와 유물 전시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송국리 유적의 또 하나의 문제는 우리가 그곳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는 점입니다. 집터에 대여섯 채의 움집이 복원되어 있지만 당시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유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멘트로 바닥을 말끔히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시관에도 복제품만 늘어놓아 진품을 보려면 부여박물관, 공주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유물을 찾아다녀야 합니다. 지방 유적지에 투입되는 관심과 인력, 예산이 충분치 않았을 것이라 예상은 되지만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소개되고 있는 대규모 청동기 유적이 그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현실이 답답합니다.

부여 송국리 유적 모습입니다. 요시노가리의 부드러운 능선, 너른 들판과 무척이나 닮았지요?
송국리 유적에 움집 몇 채만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은 송국리 주민이신 고령의 인국환선생님이 지키고 계시지요. 한 사람의 방문객이라도 손수 안내해주시는 정성에 늘 감사드립니다


일본 규슈의 요시노가리 유적이 한반도 도래인에 의해 만들어진 야요이 문명의 현장이라는 사실에 이제 반기를 들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실이 일본인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고 한국인은 우쭐댈 일이 아닙니다. 바다를 건넌 한반도 도래인은 일본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고향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이루어낸 문화는 더 이상 한국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문화가 되었으니까요.


그 어느 때보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서로를 싫어하는 마음이 커진 것은 역사의 앙금과 현재의 질투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앙금이 아닌 우호와 공통점을 찾아 나간다면 두 나라 간의 미래도 밝을 텐데 말입니다.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면서 8편에 걸친 <규슈에 새겨진 한국사>시리즈-북규슈편을 마무리합니다.

     

양국의 지난 역사는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이러한 반목은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어렵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규슈에 새긴 한국사> 시리즈-북규슈편을 마치면서 직접 가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북규슈 답사 루트(3박4일)를 요약해 올리고 게재했던 글들을 링크해 놓겠습니다.^^


1일차: 인천공항 출발-후쿠오카공항 도착(1시간 15분 소요)-가라쓰시로 이동(자동차로 1시간 소요)-히젠 나고야성(임진왜란 왜병의 출항지)-요부코항-가카라시마(배로 이동, 백제 무령왕 탄생지)-가라쓰 시내 료칸에서 1박.

https://brunch.co.kr/@storybarista/15

https://brunch.co.kr/@storybarista/16


2일차: 도자마을 아리타 도착-도잔신사, 도조 이삼평(李參平) 비-덴구다니 가마터-이삼평 묘소-규슈 도자 문화관-보은사 백파선(百婆仙) 비-백파선 갤러리-온천마을 다케오 도착 2박.

https://brunch.co.kr/@storybarista/17

https://brunch.co.kr/@storybarista/18

https://brunch.co.kr/@storybarista/19


3일차: 간자키군의 요시노가리 역사공원-다자이후 청사 터-덴만궁-후쿠오카에서 3박.

https://brunch.co.kr/@storybarista/35

https://brunch.co.kr/@storybarista/36


4일차: 후쿠오카공항 출발-인천공항 도착.


붉은 점선으로 표시된 곳이 답사의 중심이 되는 규슈 사가현입니다(왼쪽). 규슈 사가현과 후쿠오카현을 거치는 이동 경로입니다.(오른쪽, 붉은 색 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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