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의 마지막 장소인 창의문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성벽을 따라 하산하다가 갑자기 성벽이 뚝 끊기고 아스팔트길이 나타나니 놀라지 마세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는 아담한 공원에 정자 하나가 보일 테니 잠시 앉아 쉬어가도 좋겠습니다. 서울시내 야경을 보기 좋은 '조망지점'이라는 표시도 있습니다. 그다지 높지 않은 곳임에도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대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 시 중 하나인 석각 되어 있는 <서시(序詩)>(1941)도 한번 읊조려보고요.
윤동주시인의 언덕에는 '서시정'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으니 잠시 쉬어가세요. 시비에 적힌 '서시'도 감상하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고있으면 어느새 마음이 여유로워진답니다.
시인 윤동주(1917~1945)가 태어난 곳은 북간도 명동촌이고, 그가 독립운동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29세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 곳은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입니다. 그런데 유독 이곳에 그와 관련된 기념물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에 다녔습니다. 연희전문 입학 2년 만에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에서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합니다. 윤동주가 하숙을 했던 곳은 그가 존경한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습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윤동주는 효자동길을 따라 인왕산에 올라 시상을 다듬곤 하였다고 합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써진 시> 같은 보석 같은 시가 이 시절 탄생합니다. 그는 이 누상동에서 보낸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윤동주가 이곳에 머문 시간은 단 3개월에 불과하였지요.
3호선 경복궁역에서 서촌 골목길을 따라 도보로 15분이면 도착하는 누상동의 '윤동주하숙집 터'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으니 그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뿐이지만요~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200m도 채 되지 않은 곳에 2012년 '윤동주문학관'이 세워졌습니다. 불과 3개월 머물렀을 뿐인데 이 아름다운 항일 청년시인을 지나치게 관광상품화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도 했지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작고 소박한 윤동주문학관은 호들갑스럽지 않습니다. 그의 유품 하나 없는 곳이지만 시인의 성품처럼 부끄러운 듯 말이 없고 말이 없지만 잔잔한 울림을 주는 공간이니까요. 이 건물은 지금은 철거된 청운아파트까지 수돗물 공급을 위해 수압을 높이던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개조해 만들었습니다. 용도 폐기된 일상 공간의 감성적 변신이 놀랍습니다.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에서는 그의 친필 원고(영인본)를 볼 수 있습니다. 물탱크를 그대로 살려 만든 영상실은 그가 갇혔던 후쿠오카 감옥을 연상하는 듯 음습합니다.
부모가 보내준 돈으로 편하게 유학생활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고뇌하는 <쉽게 씌어진 시>(1942)를 같이 음미해 볼까요?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엇을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육첩방 : 2.73*3.64m(3평) 크기의 일본 전통가옥에서 중간 크기의 방. 다다미방이라 하지 않은 것은 일본 말을 쓰지 않으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고즈넉한 창의문에 이르러.
어느덧 한양 최고의 명산인 인왕산을 넘어와 백악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섭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이 아니라 고즈넉한 느낌마저 드는 이곳에 숨겨진 보물처럼(실제로 창의문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요^^) 당당한 우진각 지붕의 고색창연한 문이 우리를 반깁니다. 이 문은 도성에 남은 6개의 문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창의문(彰義門)'입니다. 도성의 북쪽에 있는 소문이란 뜻으로 북소문(北小門)이라고도 불리고, 이 문을 통해 개성을 오가던 사람들이 개성의 자하동처럼 계곡이 맑고 깊다는 의미로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렀지요. 창의문의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서,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공신의 이름을 판에 새겨 문루 안쪽에 걸었습니다. 그 후로 보수공사를 거치며 지금껏 보존되어 온 한양의 사대문과 사소문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문이기도 합니다.
창의문은 도로 안쪽으로 살짝 비켜 있어서 차로만 왕래한다면 만나기 어려운 문이지요. 창의문의 안은 청운동, 밖은 부암동입니다.
창의문 후면의 섬세한 봉황조각과 천정의 두 마리 봉황 그림, 인조반정 공신의 이름이 적힌 현판(영조) 등이 눈에 띄는군요.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중「창의문」(겸재 정선, 1755, 국립중앙박물관)입니다. 창의문 안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자리에서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유서 깊은 문이 뚫린 두 번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인조반정(1623)입니다. 반정군이 이 문 밖 세검정(洗劍亭)에서 날을 씻고 결의를 다진 뒤 창의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옹립하며 반정을 성공시킵니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 국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1968년 1.21 사태입니다. 북한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한 후, 이곳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검문을 받자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경찰과 시민을 무차별 난사한 사건입니다. 그때 유일하게 생포된 무장공비가 김신조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가 순직하게 됩니다. 창의문 안쪽으로 50m 아래에 두 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동상 옆으로 ‘청계천의 발원지’라는 표지석도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 이곳은 물 흐르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으니 어리둥절합니다만, 여기서 시작된 물은 한양의 중심을 가로질러 흥인지문의 오간수문을 통해 도성을 빠져나가 한강으로 합류되었습니다.
인왕산 기슭 창의문의 안쪽은 한양 최대의 명승지였습니다. 예로부터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白雲洞)으로 불리었으며 지금의 청운동이 바로 청풍계의 ‘청’과 백운동의 ‘운’을 합한 지명이 됩니다.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린 장동 김 씨(안동 김 씨 중 한양의 장동(壯洞)을 중심으로 세력을 뻗친 새로운 안동 김 씨) 등 세도가들의 거주지였으며 겸재 정선을 비롯해 조선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창의문의 바깥쪽, 즉 도성 밖은 부암동(付岩洞)입니다. 오랫동안 도시개발에서 밀려 도심의 소음과 혼잡이 비껴가 시간이 멈춘 듯 한적한 동네였지만 최근엔 곳곳에 개성 넘치는 카페와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서면서 감각적인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말고도 부암동은 여기저기 숨겨진 이야기의 보물 창고와도 같은 곳입니다. 부암동은 별도 답사 코스로 잡아 소개하도록 할게요.^^
이로서 숭례문에서 출발한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의 답사가 창의문에서 끝을 맺습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갑니다. 햇살이 사라지자 땀 흘린 몸에서 금세 한기가 돕니다. 쌀쌀한 겨울날의 힘든 답사였지만 뭔가를 해낸 듯한 뿌듯함에 친구와 나는 서로를 자랑스럽게 바라봅니다. 창의문 건너편에서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까지 단숨에 내려옵니다. 서촌의 체부동 먹자골목으로 가 고소한 녹두전과 뜨끈한 들깨칼국수로 답사의 대미를 장식하자는 내 제안에 친구는 솔깃해합니다. 물론 막걸리는 덤입니다. 긴 시간 함께한 서로에게 고마워하며 오늘 본 것들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아집니다.^^ 참 행복한 하루입니다~~~
들깨가 푸짐하게 들어간 걸쭉한 칼국수 국물은, 고소하고 두툼한 녹두전과 잘 어울립니다.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 주는 막걸리의 청량감도 일품이지요^^
6회에 걸친 한양도성(인왕산구간) 연재를 마칩니다. 긴 장정을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